《바이센테니얼 맨》이라는 이름에서 Bicentennial이라는 단어는 200년의, 200년 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 영화의 의미를 풀어보면, 200년을 살아갈 남자라는 정도로 해석해볼 수 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는 마지막 회에 삼천포(김성균 분)의 내레이션 가운데 “아날로그와 디지털 모두를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떻게 보면 이 세대도 20세기와 21세기 모두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바이센테니얼 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 변화의 한 가운데에, 그래서 두 세기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세대는 흔치 않다. 그래서 이들을 보고 축복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인간의 삶이란 기껏해야 한 세기를 살다 갈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앤드류(NDR-114, 로빈 윌리엄스 분)에게 이런 고민은 불필요하다. 극 중 대사를 인용해본다면 「사람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만 네게 시간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지. 너에게 시간은 영원해」이기 때문이다.

 

앤드류에게 시간은 왜 영원할까. NDR-114라는 제품명에서도 보이듯이 바로 그는 인간이 아닌 기계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지난번에 리뷰한 「은하철도 999」가 떠오를 법도 하다. 은하철도 999도 마찬가지로 기계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은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갖는다. 전자의 경우 기계가 주된 사회에서 인간이 겪는 고뇌를 그리고 있는 반면에 후자는 인간이 주된 사회에서 기계가 겪는 고뇌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기계화가 은하철도 999의 이야기라면, 기계의 인간화는 《바이센테니얼 맨》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둘 모두 최종적으로 이끌어 내는 결론은 하나로 같다. 바로 「기계보다 인간으로 사는 편이 더 낫다」라는 것. 그렇지만 이러한 접근 방법의 차이로 인해 결론이 던지는 무게감은 사뭇 후자가 더 진지하다. 전자는 이미 겪어본 삶을 계속해서 유지한 것이고 후자는 겪어보지 않은 삶을 선택한 것이기에 그렇다. 삶에도 관성의 법칙은 유효해서,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큰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살아온 길이 많을수록 더 큰 힘을 필요로 한다.

 

또한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은 하나의 주제만을 놓고 다루고 있기 때문에 113화라는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은하철도에 비해서 메시지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더불어서 은하철도 999가 세기말의 모습과 주류와 비주류 등 다소 사회비판적인 성향을 띄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반면 《바이센테니얼 맨》은 다분히 철학적인 영화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해 볼 필요 없이 온전히 삶에 대해서만 고찰하도록 돕고 있는 영화다.

 

바이센테니얼 맨의 중심이야기

 


영화에 대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먼저 간략한 줄거리를 살펴보자.

 

고도의 성능을 가진, 그래서 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로봇이었던 NDR-114는 본래 가사 도우미 로봇이었고, 그나마도 그런 인간의 특성들은 제작과정상 실수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들은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과거인 2005년 뉴저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차치하고 우연치 않게 로봇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갖게 된 NDR-114는 가족들에게 앤드류라는 이름을 선물 받고 그 중에서도 작은 아가씨와 가까운 관계를 맺는다. 한편 가족들은 이 '불량품' 로봇을 위해 계좌를 만들어 주며 그의 특기인 조각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해준다. 이를 통해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앤드류는 가족의 가장이자 그의 주인이기도 한 리처드에게 「자유를 사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리처드는 자유의 대가로 집을 떠날 것을 종용하는데, 가사 도우미로 살아가며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앤드류는 주인의 말에 따라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집을 떠나게 된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은 항상 같이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이었을까? 그 보다는 앤드류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 리처드가 배려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그런 앤드류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리처드가 세상을 떠나고, 사랑인지 모를 설렘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려던 찰나에 작은 아가씨는 훌쩍 커버려 결혼을 하게 된다.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들이 더는 주변에 있지 않다고 느껴서 이었을까. 앤드류는 자신과 같은 로봇이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불량 로봇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한다. 그런 앤드류는 여행 중 여성로봇인 갈라타를 만나지만 「지능보다 성격이 있는 게 낫다」고 이야기하는 갈라타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수십 년이지나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 긴시간동안 작은 아가씨는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있었고, 앤드류는 작은 아가씨의 모습을 꼭 빼닮은 손녀 포샤를 보고서는 이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포샤와의 사랑을 위해 그는 로봇임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고자 조금씩 자신을 바꿔나간다.

 

이야기가 다소 장황하게 요약된 것 같지만 결론은 「기계의 인간화」이다. 그리고 그가 인간이 되고자 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죽을 수 있어서'다. 이는 단순히 다른 종에게 갖는 호기심, 즉 로봇이 가지는 인간에 대한 동경 그 이상이며 또한 인간이 죽으면서도 고뇌하는 '장수'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래 사는 것과 죽을 수 있는 권리. 이 속에는 무슨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일까.

 

기계가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삶의 무한함을 동경한 것은 한결같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간의 삶임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오래살고 싶어 하는 그런 열망의 궁극적인 발현은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속의 기계인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장수의 꿈을 이뤘던 사람은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시황제도 세월의 힘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그의 사후 진나라는 수년 뒤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게 본다면 죽음을 무작정 피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의연하게 맞서 삶을 잘 마무리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다가오는 죽음을 하루라도 늦추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니 말이다. 그리고 죽음은 비단 죽음에 맞선 당사자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마주하기 보다는 피하고 싶고 늦추고 싶은 일이다.

 

이런 죽음을 논할 때에 안락사를 빼놓을 수 없다. 안락사는 남겨진 사람과 떠나야 하는 사람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주제이기 때문이다. 책 「자유론」에는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는 안락사 논쟁에서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는데, 즉 “개인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존재하는가?”라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안락사에 찬성하느냐 또는 반대하느냐는 이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추상적인 논쟁은 차치하고서 죽음을 회피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볼 때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들은 그들의 본능에 역행하는 선택을 한 것일 테다. 때문에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둘 모두 바뀌지 않는 현실과 이뤄지지 않는 사랑 앞에 자살을 택했듯이 안락사를 선택하는 그들 역시도 치료되기 어려운 병과 남겨진 사람들이 더 이상은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에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한편으로는 또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 선택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막상 자신의 목전에 죽음이 도달했다면 아쉬운 인생 하루라도 더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은하철도 999속 인간들이 기계 몸을 갖고자 하는 것을 주류와 비주류의 논쟁과 같은 거창한 치장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하지만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나타나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영속성을 포기한 채 평생을 시간의 굴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선택한 앤드류의 선택은 그래서 비보편적이며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가 기계이기를 포기하고 인간의 삶을 선택한 것은 충분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는 왜 기계이기를 포기했는가?

 


제가 누구인가에 대해 인정받기 위해서요. 있는 그대로의 찬사나 평가가 아니라, 단순한 진실을 인정받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 전 고귀하게 죽는 길을 택했습니다.

 

가사 로봇으로 만들어진 NDR-114는 초기부터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었고, 이 결함으로 인해 호기심과 사고, 지능이라는 인간의 것을 갖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결함이 그에게 생기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앤드류라는 이름도, 그리고 인간이 되겠다는 선택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 결함덕분에 그는 인간의 것들을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인간의 것들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로봇보다 인간이 낫다고 판단하여 인간이기를 선택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극 중에서 작은 아가씨가 생을 달리할 때 「울 수 없다는 건 잔인한거에요. 슬픔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요.」라고 말하는데, 이를 통해 앤드류는 스스로가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과 함께 인간에 대해 동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로봇임에도 로봇은 느끼지 못할 것 같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모두 종합 해봤을 때 앤드류는 자신의 로봇 기능에 보완만을 했더라면, 예컨대 여기서는 눈물샘을 만들었다면, 실제 인간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고 보인다. 때문에 단순히 인간의 것들을, 즉 자신과는 다른 대상을 향한 단순한 동경의 발현에서 앤드류의 이러한 행동을 판단하기 보다는 더욱 설득력 있는 다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또 다른 이유를 찾아본다면 「은하철도 999 : 인간의 기계화, 주류와 비주류」리뷰에서 살펴본 주류와 비주류 논쟁에서 그 이유가 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로봇의 어원인 로보타(robota)가 체코어로 강제노동을 뜻하기에 추측해볼 수 있는 이유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그려지고 있는 사회는 은하철도와는 달리 인간이 주류인 사회이며, 로봇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하층계급, 즉 비주류에 비유해볼 수 있다. 인간의 사고와 지능을 가졌음에도 「봉사는 제 기쁨입니다.」라고 프로그램 되어있던 앤드류의 모습에 이러한 것들이 극명히 드러나 있다. 즉, 아무리 인간만의 것들을 앤드류가 누리고 있었다고 한들 그는 어디까지나 로봇에 불과하며, 따라서 비주류인 그가 주류 사회로 편입하고자 인간이 되기를, 그리고 이를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전혀 불가능 하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인간보다 나은 구조 속에서 투쟁을 선택하지 않고 순응을 결정한 그의 태도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주류와 비주류 논쟁 속에서 《바이센테니얼 맨》의 온전한 해석을 찾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또한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인간들이 은하철도 속 기계인간들과는 달리 사악하게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한 몫 거든다. 물론 그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인 것은 앤드류가 비로소 죽음을 앞두고서야 이뤄졌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앤드류는 왜 로봇임을 포기하고 인간임을 택한 것일까. 왜 스스로 시간의 속박에 뛰어 들어가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앤드류가 삶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데에서 찾아보는 것이 옳아 보인다. 즉, 삶의 의의를 단순히 살아있다는 데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유한하기에 누릴 수 있는 가치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한 정답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에 리처드에게 자유를 요구하며 이야기 할 때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얻고자 했던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데서 그러한 개념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고 뒤이어 「단순한 진실을 인정받는 것이 제 목표」라며 죽음을 결정 한다고 할 때 분명한 정답을 얻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앤드류가 무엇을 위해 죽음을 결정한 것인지가 영화에 또렷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그저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만 나와 있을 뿐이다.

 

삶이란, 정해진 길만을 걷는다는 것은 아니다.

 


앤드류는 NDR-114로 태어났다. 그는 로봇으로 태어났으며 로봇으로 살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인간이 되었으며, 인간보다 오래 살았지만 어쨌거나 인간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은 그가 죽을 때가 되서야 비로소 그를 인간으로 인정했지만, 사실 앤드류는 그가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로봇임을 거부할 수 있었고, 같은 로봇인 갈라타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포샤와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선 단락에서는 앤드류가 죽음을 선택한 것을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함」이라 언급했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죽음을 결심한 것은 포샤의 「생명장치를 꺼줘」, 그 한마디였음은 분명하다. 결국 앤드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겠죠?」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던 과거의 그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떠날 수 있는 그가 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포샤도 그런 앤드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See you soon.」이라고.

 

운명처럼 보이는 자신의 삶을 버리고서 다른 인생을 찾는다는 것은 어렵다. 앤드류도 로봇으로 정해진 그의 운명에서 벗어나 「당신은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인간으로 기록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기까지 20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앤드류의 삶이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운명에 순응하지 말고 인생을 영유하라고 말이다. 삶이란 정해진 길만을 걷는다는 것은 아니라고.


img ⓒ Bicentennial Man ,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