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러셀의 여러 저작들 가운데, 이번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인기 없는 에세이>를 제외하고서 내가 접한 책은 행복의 정복이 유일하다. 그나마도 책을 완독하지는 못했는데, 첫 번째는 잘 시간도 부족한 군에서 처음으로 접했다는 이유고, 두 번째는 그래서 사색할만한 여유도 없는 판에 철학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는 이유도 한 몫 거들었다. 어쨌든 몇 장 읽어보지 않고 책은 다시 도서관의 한 편으로 밀려들어갔는데, 아마 그 이후로 그 책은 군 도서관에서 빛을 다시 보지 못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러셀의 책을 읽게 되면서도 그 때의 악몽(?)이 다시금 살아나는 것 같아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애석하게도, 러셀의 책을 처음 접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도 읽을 시간이 없었다. 혹자는 책은 짬짬이 읽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는 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은 아마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수능이 한 자리로 다가왔는데 책을 읽으라고 독촉하는 느낌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여차여차 해서 주변이 조금 정리되고 러셀의 <인기 없는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는데, 1'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를 읽으면서 그 옛날 행복의 정복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과거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야 말았다. 헤겔의 철학과 교조주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경험론적 자유주의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 정도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떤 흐름을 따라서 그런 결론을 내리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소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책은 읽어 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2'초보자를 위한 철학' 이후로 다뤄지는 다른 에세이들은 1장에 비해 비교적으로 쉽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어쨌건 1장을 빼면 책은 서문에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쉽다'

 

다만 책이 쉽게 쓰였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를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대개의 철학서라는 것이 일반인들이 쉽게 읽기에는 난해한 문장과 단락으로 이뤄져 있는 경우가 많고, 또한 비평가의 눈과 일반 대중의 눈은 전혀 다른 별개의 시선이라서, 의도적으로 대중의 시선에만 맞췄다가는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비판받을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선을 러셀도 의식했는지 책의 제목을 '인기 없는 에세이'라고 뽑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러셀 스스로가 인기 없을 것이라고 평하던 그의 에세이들은 단순히 쉬운 것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2.

 

책은 러셀이 그 당시에 출판하지 못하고 가지고만 있던 여러 에세이들을 묶어서 담고 있다. 그래서 각각의 챕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보다는 각각의 별개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9장과 10장처럼 인류의 도움이 / 해가 된 관념들을 제외하면) 그러나 책 '인기 없는 에세이'속 에세이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결국 하나의 특이점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책의 여는 글 속에 담겨져 있다. '그 목표는 이제껏 우리의 비극적인 세기를 특징지었던 교조주의가 좌파에서도 우파에서도 성정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막는 것이었다.'

 

러셀은 여러 이유들을 언급해가며 이를 계속하여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어떤 이유에선 간에 교조주의가 비극적인 결론으로 수렴하는 것은 분명하다. 러셀은 책 속에서 '불분명한 미래의 선을 위해 명확한 현재의 악을 감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교조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예컨대 종교라거나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의 모든 것들이 모두 이러한 행동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극성 종교의 경우 내세의 구원을 위해 현세에서의 무리한 행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나치즘의 경우에는 유대인을 몰살시키는 것이 미래의 선을 매우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에도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현실 속에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먼저 세운 가설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며,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한 채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극단적인 태도가 인류를 어떻게 파멸로 몰아넣을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이는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서 어느 곳에서든지 있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우파는 굳이 언급하지 않고, 좌파만을 살펴보자. 우리가 흔히 좌파라고 생각되는 사상을 나라의 핵심 사상으로 삼았던 소련을 살펴보면 된다. 러셀은 책속에서 '러시아와 비슷한 기후를 갖는 캐나다에서는 밀의 품종 개량을 위해서 실험을 하지만, 소련에서는 밀의 품종 개량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뒤적여 본다.'라며 극단적으로 표현해놨는데, 실제로 그렇다. 애초에 교조주의적 성격을 띠는 그 어떤 곳이던지 간에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몸에서 열이 나고 너무 아파 이야기 했더니 병원에 데려가기는커녕 기도를 해주는 것. 보다 극적인 사례들은 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도 여러 번 방영되기도 했다.

 

3.

 

이러한 교조주의가 판치는 세상 속에서 유일한 해답은 명확하다. 러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험적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의 가설을 설정하였다면, 이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이러한 가설을 수정해 나가는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오늘을 위해 살아라.'는 것은 아니다. 다가오는 겨울과 봄을 대비하기 위해 식량을 비축하고, 기계를 손보는 것과 같은 일들은 현재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귀찮고, 또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다가오는 미래의 안녕을 비교적 '분명하게' 보장해준다. 이러한 경우라면 현재에서의 고통을 다소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에도 무조건적으로 어떠한 사상을 쫓고 추종한다면 이는 비극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러셀의 이러한 이야기는 반세기도 더 된 이야기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우리나라의 좌파나 우파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기도 하다. 러셀의 이러한 주장을 단순하게 넘어가버린다면, 인류의 역사에 발전이라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이 옛날의 뉴턴 역학만을 쫓고, 무조건 그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했다면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과 같은 새로운 과학은 등장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인기 없는 에세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함께읽는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