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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ovie

언싱커블(Unthinkable) :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진다

by 카쿠覺 2013. 3. 9.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세상에는 명확한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북한의 핵문제 역시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에 일맥상통한다. 북핵 문제와 같은 이런 종류의 문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적으로 바라본다면, 북을 무조건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그런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는지를 고려해서 충분한 지원을 해주는 편이 바람직하나 그간의 북의 행동으로 미뤄 현실적으로 봤을 때 그런 방법이 효과가 없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마냥 북을 몰아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역시도 확실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태도를 보고서는 애매한 양비론을 설파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물론 북핵문제의 경우에는 명확한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당근이든, 아니면 채찍이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이 당근, 그리고 채찍이라는 말을 '당근과 채찍'이라는 말로써 함께 사용하지 따로 쓰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는 우리들 스스로가 그 두 사이의 경계가 불명확하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는 그저 이 둘 사이에서 어느 부분에 비중을 더 둬야 하는가를 놓고서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영화 언싱커블(Unthinkable) 역시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포스터에 나와 있는 'Right and Wrong no longer exist'라는 말처럼,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테러를 일으키려는 자와 테러를 막으려는 자, 이 둘 사이의 선과 악의 경계는 분명하나,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행동 역시도 나름의 명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테러를 막으려는 자 내부에서도 선과 악의 경계가 다시 나눠진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모습 속에서, 무엇이 정의인지도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된다.

 

테러를 일으키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자

 

 

영화는 테러리스트인 스티브 아더 영거가 미국의 세 곳에 핵폭탄을 설치해 놓고, 미국정부를 상대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달라고 이야기 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영화에서 던져주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인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은, 테러리스트로부터 핵폭탄이 설치된 세 곳의 장소를 알아내라는 임무를 받은 H와 브로디의 방법의 차이에서 생겨난다. 앞선 단락에서 언급했듯이, 당근으로 그 장소를 알아낼 것인지, 아니면 채찍으로 그 위치를 알아낼 것인지, 같은 목적 아래에 두 가지 수단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 질문이 생겨난다.

 

이는 비단 영화에서만 다뤄지는 내용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영화에서와 같이 테러리스트를 상대로 한 고문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H가 행하는 수준의 고문이 행해지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문이라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도 개인에게 충분히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어떤 수준인지를 논한다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다만 이러한 현실의 행동이 지탄받는 것은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이슬람인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인데, 이를 미리 알았던지 영화 속에서 고문을 받게 되는 자는 명백한 테러리스트로 설정되어 있다.

 

고문은 왜 정당하지 못한가?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확인하기에 앞서서 먼저, 영화가 다루고 있는 핵심 소재가 '고문'인 만큼, 오늘날 고문이 왜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대개의 경우 고문의 비정당성을 논할 때 언급되곤 하는 부분이 '범죄자의 인권'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권유린을 담보로 한 고문이 정당화 되지 못하는 이유로 범죄자의 인권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인권을 유린한 범죄자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반감을 가져다줄 수 있고,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한다면, 고문이 정당성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고문을 통해 얻어낸 진술은 신빙성이 없을 경우가 많다'라고 보는 게 더 사실적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극속의 심문 장면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당장의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거짓 진술을 하는 경우가 바로 그 예다. 이는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 역시도 유효해서 고문이 합리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영화 언싱커블(Unthinkable)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영화에서는 고문으로 얻어낸 진술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또 다른 이유는 고려하지 않게끔 유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브로디와 국장과의 대화에서 알아볼 수 있다. 브로디가 이러한 고문을 두고 국장에게 '비 헌법적이다'라고 이야기 하자 국장은 '핵폭발로 사람들이 죽어버리면 헌법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차후에 이들을 인권유린자로 기소하면 되니 일단 이 일을 끝내도록 하자'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당근 역시도 고문의 일부일 뿐

 

 

영화가 던져주는 물음은 '고문은 필요악이다'라는 H와, '고문은 비인륜적이다'라는 브로디라는 두 가지의 정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영화가 흘러감에 따라, 정확하게 말한다면 브로디의 태도변화를 통해 우리는 영화가 던져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고문의 필요성을 넘어선 또 다른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영화가 하고 싶던 말이 순전한 고문의 필요성 여부였다면 브로디는 끝까지 H가 고문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하고, 그 둘 사이에 명확한 대립각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지 못했고, 심지어 H가 브로디를 이곳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런 추론뿐만 아니라 브로디의 말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가 H에게 말했던, '네가 할일이나 계속 하세요'라는 말에서 말이다.

 

결국 브로디는 영거 앞에서 선한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당신이 핵폭탄의 위치만 나에게 털어놓으면 이 고문은 중단될 것이라고. 그렇다면 브로디는 정말 '선한'역할을 맡고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얻기 위해서는, 채찍에는 항상 당근이 따라다니고 당근에도 마찬가지로 항상 채찍이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근과 채찍은 고문과 그렇지 않은 것 두 가지로 명확하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모두 서로간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당근 역시도 고문의 한 방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또 다른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H의 태도로 미뤄 짐작할 때 이러한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먼저는 앞서 언급했듯이 H가 브로디를 직접 선택했다는 점이며, 두 번째로는 H는 단 한 번도 영거로부터 핵폭탄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H는 그저 채찍을 위해서만 존재했고, 브로디는 이와 마찬가지로 당근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만 존재했다는 이야기이다. 브로디도 결국은 자신이 손가락질 하던 H와 마찬가지로 비윤리적인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브로디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무엇이 옳은 행동인가?

 

 

브로디로 부터 '네 할 일이나 하세요.'라는 말을 들은 H는 그녀에게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상상이상의 것이다'라며 되받아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언싱커블이라는 단어는 이 뒤에 이어지는 H의 행동에서 이뤄진다. 자신이 예전에 영거를 취조할 때 이용했던 고문 방법 중 하나로 그의 부인을 영거 눈앞에서 살해했듯이, 이번에는 그의 자녀들을 데려온 것이다. 영거는 자신의 자녀들까지 살해당할까 두려워 핵폭탄의 위치를 이야기 하지만, H는 취조를 멈추지 않았다. 핵폭탄이 세 개가 아니라 네 개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라진 핵물질은 18파운드로, 한 개의 폭탄에 4.5파운드의 핵물질이 사용되었다고 가정하였을 경우, 4.5*4=18파운드로 하나의 폭탄이 더 남아있어야 산술적으로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정황상으로 봤을 때에도 그가 일부러 잡혀 들어와 모든 과정들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탄이 하나 더 있어야 말이 되는 상황이었다. 'H'는 그러한 믿음 하에 고문을 더 진행하려 하지만 브로디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만류로 인해 결국 더 이상 취조를 진행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지금까지의 고문은 '그는 테러리스트다'라는 확실한 사실 아래에 진행되었지만, 영화의 마지막 무렵, 즉 H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핵폭탄이 더 남아있을거라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그의 주장, 내지는 추론일 뿐 확실한 사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지 않은 용의자를 대상으로 한 고문이 가능한가?'라는 새로운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브로디와 국장 등 여러 인물들의 만류로 인해, 그리고 그 와중에 영거가 자살을 하게 되면서 끝나버리지만 말이다.

 

 

감독이 그렇게 묘사하고자 의도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인물들을 평가해보자면, 영화에서 브로디는 감성적이고 한편으로는 인권주의자로 보일수도 있지만 사실 그 속내를 본다면 결국은 고문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자 H에게 모든것을 떠넘기는 위선적인 캐릭터로 묘사해 놨다. H는 마지막 상황에서도 고문을 진행함으로써 답을 얻어내려 하는, 이성적이면서 또 다른 면으로는 매우 잔인한 캐릭터로 그려놓았다. 영거 역시도 그가 테러를 일으킬만한 명분을 제시해놓았다. 어떤 캐릭터를 정답으로 선택할지는 보는 개개인의 몫이지만 감독은 나름 답을 제시해놓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나 싶다. 남아있던 네 번째 폭탄이 터지는 모습을 결국은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문을 더 진행하려던 H의 선택을 옹호할 수 있겠지만, 아무런 확신이 없는 그 상황에서의 선택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 때문에 우리는 - 영화 전반적인 흐름상으로 미뤄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 그 상황에서 H의 고문을 말리던 브로디의 행동을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체 옳은 것은 무엇인가? 선하고 악함의 구분은 명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를 본 후, 분명하게 내리기 힘든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내려야 하는지는 영화를 보고난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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