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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조지오웰 1984 : 극단적인 전체주의, 왜 변화하지 못할까?

by 카쿠覺 2022. 4. 18.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다

 

개인의 사생활을 통제하고 감시한다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는 '빅브라더'라는 단어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오세아니아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국가이다. 국가가 개인의 모든 행동과 말을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심지어 그들의 자녀들까지 이용하여 감시하며 통제하고 있다. 이런 전체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속 가공의 사상인 영국사회주의의 대표이자 체제의 상징이기도 한 자가 바로 '빅브라더(대형)'이다. 그래서일까, 소설속 런던에서는 '빅브라더는 당신을 지켜본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라는 포스터가 도시 여기저기에 붙어 있다.

이 극단적인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비단 통제와 감시뿐만 아니라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사상에 따라 '신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며 당의 방침과 반대인 언어를 제거하고 어휘의 가짓수를 줄여나가며 개인으로부터 생각의 자유를 박탈시킨다. 또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에 맞서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이 모순되는 상황을 모순과 관계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중사고(Double Thinking)’라는 개념을 생성,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를 실천하도록 지시한다. 소설 1984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그런 전체주의 국가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왜 사람들은 이 체제에 수긍하는가?

 

 

소설 속에서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당원이고 하나는 노동자이다. 모두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나 노동자는 당원과 비교하면 당으로부터의 감시에서는 더 자유로운 편이다. ‘노동자(Proles)와 짐승은 비슷한 수준으로 대우한다.’라는 정책 아래에 노동자는 기초적인 교육 외에 다른 교육을 받지 않는 등 당에 의해 철저한 우민화 정책을 적용받기 때문에 감시와 통제의 필요성 자체를 당 차원에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급사육(prolefeed)이라는 신어를 통해 당이 노동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노동자는 체제의 허구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노동자들이 애국심에 불타 골드스타인을 성토하고 늙은 부부를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죽인다.’라는 내용을 다루며 그들의 무지함을 보다 강조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에 비해 당원들은 텔레비전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수신과 동시에 방 내부를 송출까지 하는 텔레스크린이라는 기계가 설치되어 당원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감시받게 되며 또한 당에서 방영하는 선전 영상 외에는 볼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신어, 이중사고와 같은 개념으로 개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거세하고 빅브라더가 통치하기 전의 세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숙청당하는 등 노동자와는 달리 강력한 감시와 통치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작중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처럼 당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지만 결국에는 노동자 계급과 같이 체제의 허구성을 느끼지 못한 채 수긍하게 돼버릴 것은 명약관화하다. 윈스턴이 일기에 쓴 표현을 빌려 표현한다면, ‘체제에 대한 의식이 드는 순간 체제는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들은 체제를 영원히 의식할 수 없을 테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인 '전쟁'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기술의 발달로 사회에서는 잉여생산품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회 구성원 전체의 생활 수준은 이전보다 향상되었다. 향상된 생활 수준에 발맞춰 대중의 의식 수준 역시 기존보다 높아졌고 이는 곧 체제를 의식하고 체제를 바꾸고자 하는 생각 또는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반대로 이와 같은 잉여생산품 발생을 억제할 수 있다면 대중들의 의식 수준의 향상을 억압함으로써 체제의 안정성을 꾀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을 막을 수는 없으므로 잉여생산품을 사회 전체가 골고루 나눠 가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체제 유지의 한 방법이 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방법은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일부 소수 인원이 많은 양의 잉여생산품을 보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이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반발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보유가 아니라 소모의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어떨까?

잉여생산품을 소모하는 방법에도 역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다수의 사람을 국가라는 구심점으로 한데 엮으면서도 그러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을 통하여 무의미하게 그리고 지속해서 잉여생산품, 즉 재화를 소모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재화가 사회에 골고루 전달되는 것이 사전에 방지된다. 소설 속 세계를 삼분하고 있는 유라시아, 오세아니아, 이스트아시아 세 전체주의 국가 모두가 전쟁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은 경제, 군사적 발달과 더불어 대중의 무지를 이뤄낸다. 무지한 대중으로부터의 혁명은 일어날 수가 없으므로 그들의 체제 역시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게 된다.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의 권력

 

 

대부분 정상적인 국가의 지도자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이념 또는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권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소설 1984속에서 권력의 속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권력은 어떤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바로 그것이 끝없는 전쟁이 계속하여 이뤄지고 있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작중에서 '전쟁은 지배집단의 그 백성에 대한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은 영토의 정복이나 반항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있다'라고 언급한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의 승리도, 그리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패배로도 귀결되지 않는 무한한 전쟁이 이뤄지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 권력은 '세계를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통해 세계를 통일하고 난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또 다른 전쟁을 할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이는 곧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인 그들에게는 올바른 선택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전체주의, 왜 바꾸지 못할까?

 

 

조지오웰이 소설 1984는 그야말로 전체주의자의 이상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끔찍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대한 힘에 눌린 채 자신이 있는 곳이 어떤 세상인지 또렷하게 바라보지를 못한다. 글 전체에서 우리는 그런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로 잉여생산품의 분배를 억제함으로써 대중들의 부의 소유를 통제하고, 이를 통해 의식의 향상을 막는다를 꼽았다. 하지만 소설 1984속의 오세아니아는 이 보다 더 강력한 방법으로 대중들의 의식이 향상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바로 '신어'이다.

사람은 언어로 사고한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자라고 한들 어휘력이 떨어지면 수준 높은 사고를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를 비틀어서 바라본다면 '언어를 통제할 수 있다면 대중의 의식을 통제할 수도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소설 1984속에서는 이를 위해 혁명을 기점으로 '구어'와 '신어'를 나누는데, 신어를 만들면서 수많은 단어를 삭제하고 새롭게 만든다. 예컨대, 체제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나쁘다', '반대한다'라는 동사가 필요한데, 이런 단어들을 삭제하고 이를 대신하여 '안 좋다', '안 찬성한다'라는 식으로 그 의미를 전달할 수는 있지만 그 의미가 이전에 비해 다소 축소되는 단어를 만드는 것이다. 작중에 나타나는 신어의 목적은 ‘영국사회주의의 신봉자들에게 적합한 사고 습성과 세계관의 표현수단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영국사회주의와는 다른 사상의 구성이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써 위 예시는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거세하려는 신어의 목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이 대중의 언어마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대로 바꾸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수도 있다. 윈스턴의 말처럼 의식해야만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오세아니아는 언제나 그 체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일 테다. 윈스턴은 그런 세상 속에서 혁명을 꿈꿔본 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꿈은 101호실로 대표되는 당의 폭력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겠다던, 윈스턴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도덕적 고결성을 표현하는 줄리아마저 끝내 포기하고 만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나와 한 가게에서 '우거진 밤나무 아래, 나 그대를 팔고 그대 나를 팔았네.'라며 쓸쓸하게 한 구절을 읊는다. 그리고 소설은 완전히 의지가 꺾인 채 폐인이 되어버린 윈스턴의 입을 빌려 다음의 한 문장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래서 더욱 처연한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작금의 정치 상황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감사히 여기고 정의라는 미명하에 국가의 권력을 전횡하는 이들을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 (He loved Big Brother.)’

 

1984 -
10점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민음사
민음사에서 조지 오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대표작 <1984>를 새롭게 펴냈다. <1984>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디스토피아 소설로, 날카로운 풍자와 정치적 함의로 유명하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언을 탁월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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