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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ovie

디태치먼트(Detachment) : 오늘날 학교의 냉철한 단상

by 카쿠覺 2013. 7. 6.


그 오랜 옛날부터 한 개인을 인격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시키는데 있어서 학교는 대부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부턴가, 학교는 사회로부터 신임을 잃기 시작했고, 이는 학교의 권한이 축소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학교에 바라는 사회적 책임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러한 바람과 가능성의 총체적 변화들이 소통과 학생 인권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학교의 모든 권한이 교사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지난날에 대한 반동이며 또한 학교의 실제 주인이기도 한 학생의 자치권을 회복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학교의 이러한 민주적인 변화는 굉장히 긍정적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그 출발이 공교육의 긍정적인 측면을 더욱 확대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 보다는 부정적인 점을 없애기 위한 수동적인 변화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게 된다. 즉, '이렇게 해보니까 좋더라.'라는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인한 변화가 아니라, '이렇게는 더 이상 하지 말자'라는 부정적인 피드백으로 인한 변화라는 점이다.

 

또한, 그러한 특성으로 인해 이 변화는 학생의 권한을 증가시키기 보다는 교사의 권한을 축소하는 데에만 급급했고, 이는 긍정적인 변화를 유도하기는커녕, 또 다른 문제가 발생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즉, 학생의 인권을 신장시킨다는 명목 하에 교사의 권한을 무조건적으로 제한하다보니, 학생과 교사간의 소통이 장려되기는커녕 오히려 '교사가 학생을 두려워하는' 기현상을 학교에 불러오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학교의 주인이 기존에는 교사였다면 오늘날에는 학생으로 변하게만 했을 뿐, 학교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주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학교는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우울한 곳

 


영화 'Detachment'(디태치먼트)는 앞서 언급했듯이 학교가 비단 학생만이 싫어하는 공간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우울한 곳이라는 오늘날 교육 현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도 그렇지만, 극의 끝에서는 주인공인 에드리언 브로디(헨리 役)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복도 아래로 내려갈 때, 또는 교실로 내려갈 때, 혹시 너네는 밑으로 눌리는 느낌을 느끼나?'라고 헨리가 학생들에게 묻자, 헨리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손을 다 들어 올린 것.

 

사실 우리가 교육 현장의 문제를 떠올릴 때, 학생이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에는 초점을 맞추는 반면, 교사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즉, 우리의 생각 속에서 교사는 학생처럼 교육 현장에서 상처 입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학교를 개선해나가야 할 관리자이자 또는 모든 문제점의 발단 정도로만 존재한다. 영화 디태치먼트(Detachment)는 학교 현장의 그러한 이중성을 잘 보여주고 있고, 또한 학교에서 교사가 받는 스트레스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가정이 병들면, 학교도 병든다.

 


이와 함께 영화는 기존의 교육 현장의 문제 원인으로 지목되지 않았던 새로운 부분을 들춰낸다. 바로 학부모이다. 영화는 뚱뚱하단 이유로 따돌림 당하고 있는 한 여학생의 학부모와, 학부모를 학교에 초대하는 날 대부분의 학부모가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두 가지 사건을 통해, 학부모의 무관심이 교육 현장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또한, 그러면서도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학교와 교사에게만 전가시키려고 하는 모습까지 보여줌으로써 교사가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굉장한지도 마찬가지로 함께 그려내고 있다.

 

물론 살아가는 것이 팍팍하다보니 자녀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무관심에 그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던 여학생이 집에서 부모에게 조차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와 집, 그 어느 곳에도 마음 둘 곳이 없던 그 여학생이 끝내 자살을 택한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이 여학생의 학교생활, 가정사, 그리고 끝내는 자살로 결말나는 일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은 가정이 이미 병들어 있기 때문에 학교가 병들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만약 이 여학생이 최소한 집에서라도 존중받는 삶을 살아왔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그녀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택했을까? 또는, 학부모가 자신의 자녀에게 관심이 많았다면, 과연 이 여학생이 자살을 선택할 때까지 이 학교를 다니도록 했을까? 해당 여학생의 가정이 아니라 이번에는 그녀를 따돌림 시켰던 같은 반 학생의 가정으로 들어가 보자. 그들의 가정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였다면, 과연 그들은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을 따돌림 시켰을까?

 

이는 비단 영화만이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다. 영화와 마찬가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서양 격언도 있다. '한 사람의 훌륭한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보다 낫다'. 백 명의 교사가 학생들을 지도한다고 한들, 한 사람의 훌륭한 어머니가 지도하는 것보다는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즉, 가정이 바로 선다면 학교도 마찬가지로 바로설 수 있다는 얘기다.

 

교사의 마음도 건강해야 한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지만 오늘날 교육 현장의 모든 문제는 교사의 잘못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때문에 교사는 항상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고, 이런 생활을 이어가다보니 학생에게는 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으며, 딱딱하고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헨리역시도 학생들과 교감하기 보다는 피상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려 한다. 그는 영화 속에서 자질이 뛰어난 교사로 보이고 있지만, 그는 한곳에 오래있지 못하고 기간제 교사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기만을 반복한다. 그런 그는 '대리교사의 의무는 단지 반에서 사고만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하면 된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를 통해 본인 스스로가 피상적인 교사로써의 책무만 하려고 한다는 점을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헨리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데에 서툴고, 또 이를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가 따돌림을 받던 한 여학생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한 것도, 길거리에서 몸을 팔던 한 어린 아이를 보살피면서도 거리를 둔 것 모두가 바로 그러한 그의 행동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던진다. 학교가 건강하려면 마찬가지로 교사 역시도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는 점이다.

 

생각해보자. 만약 헨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데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는 분명 자질이 있는 교사였고, 단 몇 개월 만에 자신이 맡은 학급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데에 성공한다. 이는 그가 마지막 수업을 진행하던 날, 첫 시간부터 그의 말에 반항하던 한 학생이 '당신이 그리울거에요'라고 말하던 부분에서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질이 분명 있음에도, 자신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상처로 인해 한 학교에 오래 남아있지 못했다. 만약 그가 한 학교에 오래 남아있을 수 있었다면, 아마 학교를 바꾸는 데에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Detachment : 오늘날 학교의 냉철한 단상

 


지금까지 교사와 학부모로 대변되는 두 그룹을 각각 살펴보며, 영화 Detachment가 보여주고 있는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원인에 대해서 살펴봤다. 글의 끝을 내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학교 문제의 원인으로써의 학생들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영화 디태치먼트 속 학생들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로 묘사되어 있는데, 영화는 이런 학생들의 모습 위에 히틀러의 모습을 겹치면서, 학교 교육이 어느 상태까지 다다랐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통제되지 않는 학생들의 모습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같이 모두가 자존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는 극의 후반부에 진로 상담 교사와 한 학생이 목소리를 높이는 언쟁 속에서도 나타나있고, 헨리가 돌봐주는, 길거리에서 몸을 팔던 에리카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삶에 대한 비관으로 하루하루 자신을 내다 버리고 있는데, 이는 에리카가 결국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내용에서 더욱 극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 사회는 학교에게, 이런 학생들이 발생하지 않게끔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 더 나은 삶을 꾸려가도록 도와주는 것을 사회적 책무로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학교 교육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이는 헨리가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 생각 속 무덤에 닮아가는 것에 대항하며 싸우기 위해, 우리는 읽고 배워야해.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라며 교육의 의의를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장면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러한 의미를 잘 알지 못할뿐더러,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다. 시볼트가 한 여학생과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의 의상을 지적하자 단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라고 대답한 것에서도 잘 묻어나고 있다.

 


영화 Detachment는 현재의 교육 현장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너무 현실적이라서 대안을 제시하지도, 그리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황폐화된 교실에서, 헨리는 보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어셔가 이야기를 전할뿐이다.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앞서서 교육 현장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교사의 마음 역시도 건강해야한다고 설명하며, 만약 헨리가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데에 두려움이 없었다면 학교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었다. 영화는 사람과의 관계를 피하던 헨리가 스스로 에리카가 있는 병원에 찾아가,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헨리의 태도가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이는 학교 현장이 아직 변할 여지는 남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학교는 한 개인을 소중한 존재로, 그리고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펼쳐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는 학부모의 사랑 속에 자라난 건강한 한 학생과, 그리고 마음이 건강한 교사와의 의사소통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오늘 우리나라의 교육은 어느 위치에 서있나? 영화 Detachment가 우리에게 한 편의 영화 이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img ⓒ Detachment,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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