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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ovie

에덴의 선택 :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by 카쿠覺 2013. 6. 29.


장기매매와 관련된 인신매매를 다룬 영화' 공모자들'은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으며 흥행을 거뒀고, 이를 통해 조선족과 연계된 장기매매를 위한 인신매매가 한국 사회에서 어느정도로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에 대해 약간이나마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비단 이는 영화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실예로 2012년 6월, 법원에서는 오원춘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며 '인육과 장기밀매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결문에서 밝힌바 있는데(그러나 항소심 재판부에서는 이를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는 '장기매매를 위한 인신매매가 이제는 소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두운 부분 중 한면이라는 점'을 사법부 차원에서 확인시켜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테다.


그러나 인신매매가 비단 장기매매를 위해서만 자행되지는 않는다. 예컨데 장기가 목적이 아닌 인간의 노동력, 또는 여성의 경우 성을 위해서도 인신매매가 생겨날 수 있다. 노동력을 목적으로 하는 인신매매는 이전에 그것이 알고싶다 <전라도 섬노예>편에서 방영되었던 적이 있다. 여성의 성을 목적으로 하는 인신매매의 경우는 방송매체보다는 영화속에서 그러한 내용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리암 니슨이 주연으로 출연한 테이큰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인신매매에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음을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번 포스트에서 다루고자 하는 영화인 '에덴의 선택'은 인신매매의 여러가지 목적 중, 여성의 성을 사고팔기 위해 벌어지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인신매매가 미국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CNN 프리덤 프로젝트(The CNN Freedom Project: Ending Modern-Day Slavery)에서는 이렇게 인신매매를 통해 성노예로 살아가는 사람이 2천 7백만명정도라고 밝혔으며 UN은 192개 국가 중 161개국이 인신매매에 관여되어 있을 것이라고 보고있으니 말이다.


미성년자의 '성'을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



인신매매에는 여러 목적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목적은 바로 여성의 '성'을 사고팔기 위함이다. 미국 국무부는 '모든 인신매매 중 80%는 강압적으로 상업용 매춘에 끌려온 여성과 어린이들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결국 5건 중 4건의 인신매매는 모두 여성을 목표로 벌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는 성인 여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니세프에서는 '거의 2백만명의 어린이들이 국제적인 상업용 매춘에 유린당하고 있다'라고 밝혔는데, 이는 곧 나이가 어린 여아의 경우도 성을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 '에덴의 선택'은 이러한 인신매매의 모습들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인 제이미 정(현재役, 에덴役)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부유하지는 않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10대 소녀다. 현재는 어느날 술자리에서 만난 한 남자로부터 납치를 당하게 되는데, 그녀가 납치당해 끌려가는 곳은 매춘굴로, 10대 소녀만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부터 시작된다.


구원해줄 사람은 없다



사실 영화 '에덴의 선택'은 한 여성이 인신매매 집단에게 끌려가고, 그리고 그 곳에서 탈출한다는 내용으로, 이러한 내용은 다소 보편적인 소재이다 보니 여러 영화에서 다룬 내용이기도 하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테이큰의 경우도 인신매매단에 납치를 당한 주인공의 딸을 구해오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고, 트레이드라는 영화도 마찬가지로 인신매매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들과 에덴의 선택은 가장 큰 하나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납치당한 그녀를 구원해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점이다.


테이큰과 같은 영화에서는 대개 납치당한이의 가족이 그를 구해낼 구원자로써 영화속에 그려진다. 여기서 구원자 역할을 맡는 이가 능력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평범한 사람인지는 영화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테이큰의 경우 아버지 역할을 맡고 있는 리암 니슨은 혼자서도 딸을 구해내올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영화는 악의 집단에 분명한 응징을 가하고, 납치당한 이는 살아 돌아오는 기분 좋은 결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신매매 자체에 집중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우리가 테이큰을 보면서 갖는 감정은 대개 아버지가 딸을 찾아오는 과정속에서 느끼는 희열이지, 딸을 납치한 집단에 대한 분노와 같은 감정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에덴의 선택에서는 리암 니슨과 같은 구원자가 없다. 국가는 인신매매단에 납치된 그녀를 찾아내는 대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그녀의 부모 역시도 납치당한 그녀를 찾아오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자신의 삶이 끝나버릴 수도 있는 매춘굴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그녀는 스스로가 그곳에서 나갈 방법을 궁리해야만 한다. 이는 에덴의 선택이 다른 영화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구원자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에덴이 그곳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관객들에게 주지 않고 있으며, 또한 구원자가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납치당한 피해자가 주인공으로 영화에 나옴으로써, 에덴이 느낄 수 있는 무력감을 영화를 보는이로 하여금 같이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누군가가 에덴을 구해주기를 기도하지만 영화속에서 이는 불가능한 일로 그려지고, 우리는 이러한 부분에서 또 한번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에덴을 납치해간 인신매매단을 손가락질 하고 욕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런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바랄 수 밖에 없고, 그를 위해 국가가 스스로가 구원자임을 자처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에덴의 선택을 봄으로써, 단순히 영화의 재미뿐만 아니라 인신매매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택지는 애초에 에덴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본래 영화의 제목은 단순히 Eden(에덴) 이였다. 영화에서 에덴은 현재가 매춘굴(수용소)로 넘겨지면서 새롭게 받은 이름이자 그 수용소의 이름이기도 했다. 에덴은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가 살던 지상 낙원을 뜻하는데, 아마 영화속에서 여러 이름 가운데 에덴을 사용한 이유는 낙원을 의미하는 에덴과 실제 영화 속 환경의 차이를 보다 더 극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함이 아니였을까 생각한다. 현재(에덴)이 있는 그 수용소는 낙원이라기 보다는 삶의 끝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니 말이다.


그러던 것이 국내로 넘어오면서, 에덴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들어왔다. 에덴의 선택이라는 제목에는, 수용소에 갇히게 된 에덴이 그 곳에 적응할 것인지, 아니면 탈출할 것인지, 또는 자신을 위해서 다른 아이를 밀고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와 같이 매번 선택에 순간에 놓이는 에덴의 처지를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에덴에게 애초에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선택해야만 했던 것은 아마도 이곳에 계속 있을 것인지(적응을 하거나 구조를 기다리거나) 또는 스스로 탈출할 것인지일테다. 그렇지만 사실 이는 선택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곳에 있는다면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정신적으로는 죽어있는 상태이고, 또한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어가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살아남기 위해서 에덴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저 스스로 이곳을 빠져나갈지,아닐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을 위해 밀고자를 자처할 수 밖에 없었을테다.


물론 그가 이곳에 남아 구조를 기다릴 수도 있었을테다. 어디까지나 구원자가 존재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다른 아이를 밀고하지도 않았을테다. 하지만 자신을 구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 보다는 없다는 것이 더욱 명백한 상황에 그녀가 미래의 위험을 담보로 한 베팅을 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결국은 다시 에덴에게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영화의 국내 제목인 '에덴의 선택'은 어쩌면, 매번 선택의 순간에 놓이지만, 사실 그곳에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현실을 대비시켜주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실화라서 더욱 가슴 아픈 이야기



앞선 내용들에서는 인신매매의 목적,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매매, 그리고 극의 주인공인 에덴의 앞에 놓인 무기력한 상황에 대해서 짧게나마 살펴보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놀랍게 다가오는 부분은 그러한 인신매매가 굉장히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인신매매와 같은 것은 점조직 형태로 이뤄진다고 상상하기 마련이다. 예컨데 여성을 납치해오는 조직, 그리고 납치해온 여성을 다른곳으로 넘기는 조직, 그리고 이를 사들이는 조직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인신매매는 굉장히 체계적이고, 각각의 조직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속의 조직은 크게 납치조와 납치해온 소녀들에게 성매매를 강요하는 조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매매 과정에서 임신을 한 소녀는 다시금 납치조로 보내져 관리되는 등의 모습으로 보아 이 두 조직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을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렇듯 체계적으로 인신매매가 이뤄지는 상황속에서, 외부의 도움 없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인 부분은, 이 모든 내용이 실화에 근거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인신매매는 이제 더이상 영화나 소설속의 이야기, 그리고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스스로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그려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인신매매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빼앗긴 이들에게 이런 권리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하얀 도화지를 남에게 뺏긴채, 그저 남이 그려준 밑그림에 색칠할 수 있는 권리만이 주어진다. 에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하게 지내며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있던 현재라는 아이의 도화지는, 인신매매단에 의해 빼앗긴채 에덴이라는 새로운 밑그림으로 바뀌었고, 그녀는 그저 이미 정해진 테두리 내에 색을 집어넣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도화지를 뺏긴채, 그리라는 대로만 그려지는 그림속에서 인간은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덴은 그려진대로 그림을 그리는 척하고서는 이로써 그들을 속이고 빠져나오는 방법을 택했다. 모두들 그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 칠 테지만 대개의 경우 이렇게 인신매매단으로부터 탈출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을것이다. 그곳에서 목숨을 다할수도 있고, 운이 좋아서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들의 도화지는 다른 사람에 의해 그려진 그림으로 뒤덮혀 있을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 가족이 어느날 갑자기 실종된다면, 차라리 시신이라도 발견되는 것이 낫을 것이라고 말이다. 에덴이 당한 그 비참한 삶을 보고있노라면, 차라리 성노예로 사는것 보다는 편안한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으로부터 더럽혀지는 도화지를 보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도화지를 찢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십분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에덴에게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 될테다. 그녀에게는 스스로 도화지를 찢거나, 아니면 도화지에 그리는 척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었을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도화지를 찢을수는 있을 지언정 우리는 그녀에게 도화지를 찢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도화지가 남에 의해 더럽혀지게 된 이유는 바로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또 다른 선택지는 생각할 필요도, 생각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그녀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단 하나의 선택지에 집중하고, 그리하여 이러한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img ⓒ Edan,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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