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시작은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상대와의 간단한 만남을 가지려고 할때에도 '이 사람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본적인 신뢰로 시작된다. 물론 많은 경우에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실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암묵적인 상호간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신뢰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믿음을 보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기에, 내 자신이 상대를 신뢰해도 된다는 확신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 자체는 그 즉시 자신에게는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온다.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친밀하지 못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 나에게 일으킬 행동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고 심하면 공황장애까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뢰하지 못하는 상대방과의 만남이 가져다 주는 공포감이 극대화 된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개의 일반적인 경우에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과는 관계를 잘 맺지 않기 때문에 그런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느껴볼일은 거의 없지만, 어떨지는 어느정도 상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평상시에 신뢰를 주고, 믿음을 보냈던 사람이 알고보니 신뢰하지 못할 사람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우에 오는 공포감은 어떨까? 아무렇지 않게 지냈던 이웃사람이 사실은 연쇄살인의 범인이였다는 영화 '이웃사람'은 그런 내용을 잘 다루고 있지만, 주변인들이 그에게 전적으로 신뢰를 보냈던것은 아니기에 이를 통해서 상상해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와 비슷하지만 전적으로 믿었던 사람의 배신을 엿보기에 좋은 영화가 있다. 바로 리처드 기어 주연에, 애드워드 노튼의 연기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영화,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이다.
의뢰인을 신뢰해야만 하는 변호사, 그리고
리처드 기어가 맡게 된 마틴 베일이라는 등장인물은 지역에서 굉장히 유명한 변호사 중 하나이다. 모든 변호사들이 그렇겠지만, 직업의 특성상 그들은, 설령 진심이건 아니건 간에 자신의 의뢰인을 신뢰해야만 하는 위치에 서있다. 재판이 끝난 후에도 계속 의뢰인을 신뢰하건 그렇지 않건 그것은 본인의 몫이겠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기간동안에는 말이다. 마틴 베일 역시도 다른 변호사들과 그런점에 있어서 크게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다른 변호사들과 달랐던 점은, 남들이 보기에는 책임소재가 분명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惡)이라고 치부하는 쪽의 편을 항상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극에서 그가 맡고있는 사건의 의뢰인으로 등장하는 피니에로 역시도, 형사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중범죄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물론 그가 그런 사람들만을 변호하는 것은 세간에 화제가 되고 싶어서도 있겠지만 결국은 돈이다. 검찰측이 피니에로에게 제시한 금전보상형의 조정에 따라 40%의 수수료를 그가 받게된다는 곳에서 이를 쉽게 살펴볼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미뤄볼 때,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변호사의 기준에서 보자면 베일은 그 조건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의뢰인의 잘못임을 명백히 알고 있으면서도 돈을 위해서 싸우는 그저 그런 변호사 중 한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자신을 찾아온 의뢰인에게 '당신이 모아둔 돈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 돈을 쓸 시간이다'라고 말하는 베일의 모습에서 정의로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 그가 눈길을 끌만한 사건이 하나 발생하게 된다. 지역에서 존경받던 로마 카톨릭 대주교인 러쉬먼이 피살된채 발견되고, 현장에서는 19살의 소년 애런 스템플러(애드워드 노튼 분)가 현행범으로 검거되게 된다.
애런의 변호를 맏게 된 베일, 하지만
베일은 그런 애런의 변호를 무료로 해주기로 결정한다. 돈의 유무를 떠나서 이번 사건을 잘 마무리 하면 세간에 충분한 화제가 될 수 있고, 그만큼의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판단을 해서였다고 보인다. 하지만 애런을 무죄로 만들만한 틈은 보이지 않는다. 피가 묻은 운동화를 신고, 피 묻은 옷을 입은채 경찰의 체포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무작정 도망친 그이기에 누가봐도 그를 사건의 범인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애런은 베일과 처음 만나던 날 그에게 '순간적으로 기절을 했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주교는 죽어있었다'라며 현장에 제 3자가 있었을거라는 느낌을 풍기는 진술을 하지만 그 장소에 제 3자가 있었을것이라는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며 이를 증명할 방법조차 마땅치 않았다. 그러던 중에 러쉬먼 주교가 애런에게 그의 여자친구인 린다와 다른 친구인 알렉스에게 강제로 성행위를 강요, 이를 촬영한 영상이 발견되고, 이를 본 베일은 애런이 확실한 범인임을 알게된다.
그런 테잎을 본 후 베일은 애런을 찾아가 이 테잎에 대해서 왜 알려주지 않았냐며 다그치니 애런속에 있던 다른 인격인 로이가 튀어나와 사실은 자신이 저질렀다며 베일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베일은 자신의 인터뷰를 진행하던 잡지사의 한 기자와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난 유죄가 입증될때까지는 모두가 무죄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믿으니까.' 그런 베일의 모습에서는 우리가 마냥 그를 부패한 변호사라고 손가락질만을 할 수는 없다는 면을 보여준다.
유죄라는 확정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모두 무죄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가장 극적으로 사용했던 영화는 아마 세븐데이즈가 아닐까 생각된다. 모든 증거들이 피고를 가르킬 때, 그의 무죄를 받아내기 위해서 변호사역할을 했던 김윤진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이 무죄추정의 원칙이였다. 흉기가 발견되지 않은 이상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그것이였다.
베일 역시도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다', '항상 나쁜 사람만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라며 무죄추정에 대해서 잡지사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물론 그의 이런 대화는 무죄라 믿었던 애런이 알고보니 범인이였다는 사실에 대한 반동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베일이 연이어 말하게 되는 이야기 속에서 애초에 검사였던 베일이 왜 변호사라는 길을 택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고,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를 그저 돈을 쫓는 한낯 부패한 변호사로만 손가락질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실 그는 피니에로가 검찰측이 제시한 금전보상형을 꼭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설득해서 다른 주로 쫓아보낼 수도 있었을 테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40%의 수수료가 그에게 떨어지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선량한 사람들도 아주 가끔은 나쁜짓을 자행할 수 있다'라는 그의 말 속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재개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피니에로가 이주하지 않으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재개발에 관련된 사람이 검사장이였던 샤그네시와, 살해당한 러쉬먼 주교라는 사실도 그 과정중에 알아냈다.
제 3자라는 존재가 그가 가지고 있는 다른 인격이라면
그러던 도중 피니에로가 의문사를 당하게 되고, 베일은 이 짓이 바로 샤그네시의 범행임을 직감으로 알게 된다. 그가 알아낸 재개발과 관련된 음모는 재판과정에서 '러쉬먼 주교의 반대로 사업이 진행되지 않자 이에 따른 배신감으로 보복을 위해'라는 제 3자의 살인 동기로써 쓰일 목적이였으나 피니에로의 복수를 위해 재판장에서 그의 추악한 뒷모습을 보여주는데에 사용하게 된다. 그렇지만 굳이 그 동기가 쓰일 이유가 없다는 베일의 판단이 있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면 제 3자라는 존재가 꼭 다른 사람일 필요는 없을테니 말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베일은 테잎에 관련된 내용을 왜 말을 안해줬냐며 애런을 다그치던 도중에 그의 또 다른 인격인 로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현장에 존재하던 제 3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애런의 다른 인격인 로이였다'라는 식으로 분위기를 흘러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의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는 이유로 이는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던 와중 증인석에 피고인 애런이 앉게 되었고, 검사인 베너블(로라 린니 분)이 그를 강력하게 심문하던 중, 그녀의 멱살을 잡는 사고가 발생했고, 판사는 이를 토대로 정신 이상으로 인한 무죄로 결정한다.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던 베일인 만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신뢰했던 만큼 돌아오는 것은
이어지는 재판 과정에서 베일이 애런을 보면서 어려웠던 지난 날들이 그로 하여금 다중인격이라는 불행한 현재를 선물했다고 생각하며 동정심을 느끼는것 같은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재판이 끝난 뒤 그와의 만남에서 걱정말고 연락할일 있으면 하라는 그의 모습에서 베일의 진심어린 마음을 느껴볼 수 있다. 그랬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신뢰에 따른 공포이자, 허망함 그 뿐이였다.
이전에 살펴봤듯이 베일은 지금까지 쭉 세상이 범죄자라고 지목하는 사람들만을 상대하며 변호해왔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유죄 판정 전까지는 무죄라는 사실'을 항상 견지했다.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믿었던 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변호한 많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피니에로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 지역을 자신의 고향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본의 힘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기에 그런 행동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애런의 경우에는 이전의 경우와는 판이하다. 그가 줬던 신뢰라는 것, 그리고 그가 가졌던 '사람은 본디 선하다'라는 믿음 자체를 무너뜨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만나왔던 사람들, 대해왔던 사람들은 '착한 사람도 가끔은 나쁜 짓을 행할 수 있다'라는 그의 믿음에 어느정도 부합하는 사람들이였지만 애런, 아니 로이의 경우에는 그와는 정 반대의 일이였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진실된 모습을 들키지 않고 두 개의 가면을 쓸 수는 없다' 러쉬먼 주교의 가슴에 새겨져 있던 B-32-156이 가르키던 문구다. 이 단 한 문장이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두 개의 가면이 있을 때, 하나의 가면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쓰고 있던 하나의 가면을 벗어야만 다른 가면을 쓸 수 있다. 애런과 로이, 로이와 애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애런에서 로이로 넘어가던 중에 '베너블의 멱살을 잡았다'라는 그의 진실된 모습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누구를 신뢰해야 할지, 어떻게 신뢰할지, 그리고 얼마만큼 그래야 할지는 모두 개인이 선택할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신뢰한다는것 만큼 공포스러운 일도 세상에 없을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신뢰하고, 믿음을 보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 행동을 자주 해와서 인지 우리는 누군가를 신뢰한다고 할 때 쉽사리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 자체의 공포를 알게 된다면, 우리 가까이에 얼마나 많은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말 그대로 신뢰라는 것은 프라이멀 피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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