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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ovie

추악한 본성, 끝 없는 욕심. 영화 마진콜(Margin Call)

by 카쿠覺 2013. 1. 14.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거나, 어떤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주변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의 원인이 대부분의 경우에 과도한 욕심인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욕심을 단순하게 부정적인 것이라며 이분법적인 사고로 분류한 채 손가락질만 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언가를 더 갖고 싶어하고, 더 개선하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하는, 그러한 욕심이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문명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시장경제 역시도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 경제활동을 한다'라며 인간이 욕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언급하고, 그것이 곧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며 설명하고 있다. 욕심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은, 그러한 욕심을 전제로 한 경제체제가 욕심을 배제한 경제체제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그리고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뭐든지 과하면 그렇지 않은것만 못하기 마련이다. 가지고 가져도 더 가지고 싶어하는 끝없는 인간의 욕심덕분에 부는 한 방향으로만 집중될 수 밖에 없다. 그런 부의 집중은 곧 정보의 집중으로 이어져 부와 지식 모두를 축적하지 못한 일반 대중은 두 가지 모두를 가진 이들로 부터 휘둘리고 자신도 모른채 당할 수 밖에 없는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욕심이 원동력이 되어 놀라울만한 성장을 이룬 시장경제가 오히려 그런 욕심으로 인해 불행한 결말을 가져다 준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끝에 다다르면 어떨까?

  

 

마진콜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실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로써, 당시의 금융위기는 인간의 탐욕이 끝에 다다랐을때의 참혹한 결말을 잘 보여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정당한 가치 창출을 위하기 보다는 투기를 일삼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 수익만을 쫓았던 그들의 탐욕이 결국은 전 세계를 금융위기라는 비극적 결말로 이끈 것이기 때문이다. 욕심으로 시작한 경제가 오히려 욕심으로 인해 붕괴되는 역설적인 현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진콜은 그런 탐욕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적 결말에 초점을 맞춘것이 아니라, 어떤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을 때, 인간의 욕심이 그곳에서 마저 그 끝에 다다른다면, 그 결말은 얼마나 더 비극적으로 전개되어 갈 것인지를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금융위기가 터지기 하루 전날, 이 상황을 미리 예측한 재커리 퀸토(피터 설리반役)가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그들이 도덕적인 길과 욕망의 길 중 어떤 길을 택하느냐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기로에 놓은 그들

 

 

스탠리 투치(에릭 데일役)는 회사의 인원 감축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해고당하게 된다. 그런 그는 자신의 직속 부하였던 피터 설리반에게 자신이 끝내려고 하던 일이 있는데 이것을 마저 해줄 수 있겠냐라며 파일을 건네고, 그런 파일을 건네면서 그는 '조심하라'라는 말을 건네고 떠나게 된다. 그가 건넨 파일에는 회사의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여 보유하고 있는 채권의 위험도가 그들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는 내용이였다.

 

이는 그들이 보유자산의 리스크 관리에 실패했고, 그로 인해 만약에 손실이 발생할 경우 회사의 시가총액보다 더 큰 액수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이쯤에서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사실 선택의 기로라고 할 것도 없다.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부실자산을 어느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모두 판매하는 수 밖에 없다. 그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채권의 만기일이 도래하기 전에 채권의 가치가 떨어질 것은 분명하고, 채권의 매입을 위해 차입했던 금액의 상환일이 다가오면 낮아진 채권의 가치로 인해 차입금을 갚지 못해 결국 회사는 파산에 이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이 위험자산을 품고서 다른 길을 찾아 볼 수도 있을테다. 그러나 이 위험자산을 처분하는것이 가장 쉽고, 빠르고,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는 점에 이의는 없다. 다만 그들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가치가 앞으로 더 떨어질것을 알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의 근본적인 해결이 아닌, 위험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케빈 스페이시(샘 로저스役)가 회장인 제레미 아이언스(존 털드役)에게 '회장님은 쓰레기를 파는겁니다'라고 말한 곳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 스스로의 탐욕에 따른 실수를 다른이에게 떠넘기기로 하고

 

 

회장은 회사 중역들과의 대화에서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3가지 방법은 최고가 되라, 현명해져라, 아니면 사기를 쳐라'라며 자신의 신념을 그들에게 내비친다. 회사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회장이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현재 그들이 목전에 두고 있는 위기는 최고가 될 수도, 현명해 질 수도 없는 위기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기를 치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실수를 그럴듯 하게 포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극중에서는 샘 로저스와 피터 설리반이 개장을 몇 시간 앞두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과연 이 방법이 옳은 것인가'라며 서로가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보다 더 앞서서, 샘 로저스는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며 회장과 부회장(사이먼 베이커, 자레드 코엔役)에게 강력하게 어필하지만 물론 그의 이야기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부실한 자산을 다른 이에게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장이 열리고, 그들은 성공적으로 자신들의 자산을 모두 매각하기에 이른다. 모든 일을 마치고 부회장은 샘을 찾아와 '몇 명을 해고할 거다'라며 이야기 하고, 그는 더이상은 버티지 못하겠다며 회장에게 찾아가 자신은 이제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결국 도덕적 가치를 주장하던 샘이 자본의 힘에 눌리고 그 끝에는 자신이 직접 그 세계에서 떠나는 듯한 모습을 취하는 것처럼 보여주지만 그는 다시 '이곳에 남아 있겠다'라며 말을 바꾼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가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전 계속 일할겁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저는 돈이 필요해요'. 사실 샘은 연봉으로 2천만달러 이상을 받고 있고, 그곳에서만 벌써 수십년을 근무했기에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그에게 더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또한 그가 영화 전반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면은 안된다'라며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납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결국은 그의 끝없는 욕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그가 했던 도덕적인 발언들을 조금 비꼬아서 생각해본다면, 그가 취했던 모든 행동들 역시도 그의 욕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극 중 분위기로 미뤄볼 때 에릭을 해고시키는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샘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의 부하 직원들의 80%가 해고당했을 때에도 자신의 부하들이 해고당한것에 대한 슬픔보다는 자신이 아끼던 개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슬퍼한 그이다. 그런 그가 영화의 끝에서, '이렇게 부도덕적인 짓을 하고서도 직원들까지 해고하려 하느냐'라며 '사직하겠다'라는 반응은 납득하기 힘들다. 결국 그의 그런 행동은 임원들에게 자신이 직원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음을 확인시킴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다지려는 그의 욕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하기가 힘들다.

 

그런 그의 이중적인 모습은 영화의 엔딩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어쨌거나 자신이 결정한 선택으로 인해 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고, 자신들의 해고당한 직원들은 그런 부도덕적인 짓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른 증권사에 취직하는것도 거의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죽은 개를 부둥켜잡고, 그를 묻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주려던 것은 결국 그 역시도 욕망에 사로잡힌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기에, 당할 수 밖에 없다

 

 

영화의 중반즈음에, 회장과의 회의를 마치고 부회장과 데미 무어(사라 로버트슨役)가 엘리베이터 내에서 앞으로 어떻게 할것이냐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는 한 청소부가 그 두 사람 사이에 껴 자신이 갈 층을 기다리며 서있다. 이 장면에서 굳이 이 청소부가 나올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그 공간에 그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들은 결국 그 청소부와 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눈 깜빡한 사이에 코를 베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부와 정보가 일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두 가지가 있어야만 승승장구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대에서 모두가 부족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에게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남들보다 더 높은 도덕적인 가치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고, 그들의 힘이 부도덕하게 사용된다면 다수의 선량한 피해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은 현실에서는 권선징악과 같이 악한자가 처벌받고 선한자가 결국은 승리하는, 그런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영화에서나마 그런것이 실현되기를 무의식중에 바라기 마련이다. 그것이 아무리 식상하다고 운운하더라도 말이다. 비슷하게 주식시장 이야기를 다룬 영화 '작전'만 보더라도, 결국 영화는 부덕하게 돈을 벌어보려 했던 쪽의 일방적인 패배로 결말이 났다. 하지만 그런 영화를 통해 현실을 위로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다. 또한 우리가 관심이 없는 분야의 내용을 권선징악의 가벼운 내용으로만 다룬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현실의 도피이자, 감독으로써의 책임 회피일수도 있다.

 

선이 악을 벌하는 현실은 이제는 없다. 최소한 돈이 오가는 곳에서는 말이다.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부와 정보를 가진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이기는 것이고, 결국은 그들이 선의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다. 영화를 통해서 위로를 받을 필요도 있지만 냉혹한 현실을 보다 직접적으로 바라 볼 필요도 있다. 더더욱이 우리가 잘 모르는 곳이라면 말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마진콜(Margin Call)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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