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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ovie

다수의 의견은 곧 진리인가? 영화 런어웨이(Runaway Jury)

by 카쿠覺 2013. 1. 19.

 

2008년 국내에서도 국민참여재판제도라는 이름으로 배심원제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다만 미국의 경우에는 배심원들이 판결 결과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만 국내의 배심원제의 경우 미국만큼의 구속력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어찌되었든 이런 배심원제의 가장 큰 특징은 한명의 법관에 의해 모든 결정이 났던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사람으로부터 재판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 때문에 보다 합리적이며 정당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판사가 '배심원제는 단 한명의 재판장으로 사람을 사형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는 천년 반성의 산물이다'라고 언급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이 곧 진리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이 많이 모여있다고 해서 보다 옳은 결정을, 그리고 합리적 결정을 내린다는 무조건적인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과 법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평범한 국민들 가운데 선출한 배심원들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과연 그들이 이 재판을 평가할 만한 자질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배심원제의 맹점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최고의 배심원 컨설턴트, 랜킨 피츠

 

 

배심원 컨설턴트라는 직업은 무엇일까? 현실에서의 배심원 컨설턴트는 변호사가 배심원을 선택하고, 효과적으로 배심원단을 향해 변론할 수 있도록 배심원을 분석하는 몫을 담당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변호사를 보조하는 역할이지, 그를 뛰어넘는 역할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와 효율적인 변론을 통해 합리적인 판결을 받는것이기 때문에 변호사가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것이다. 다만 오늘 다루고 있는 런어웨이라는 영화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다.

 

앞서서 언급했다시피 미국에서는 배심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물론 배심원의 말을 판사가 꼭 따라야 하는것은 아니지만, 그런 전례가 전무하며, 또한 미국 법정은 판례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배심원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데에 아주 결정적인 영향권을 가지게 된다. 판사는 배심원들이 내린 결정을 토대로, 유죄를 판결받은 피고에게 형량의 크기를 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배심원단 역시도 판사만큼 중요한 위치에 서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배심원을 향해 잘 설득하고 변론해야만 재판의 결과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올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방면으로 진 핵크만(랜킨 피츠役)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배심원 컨설턴트다. 배심원이 중요한 만큼, 배심원 컨설턴트도 중요하게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다시피 어디까지나 변호사의 보조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메인이 되고 있다. 왜일까?

 

이는 바로 배심원 제도가 가지고 있는 맹점을 그가 잘 활용하기 때문이다. 배심원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수의 국민을 대표해 선출된 그들이 과연 해당 사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것이다. 물론 재판의 시작 전 변호인들이 배심원의 부적격 여부를 판단, 불리하거나 객관적인 평결을 기대할 수 없다는 배심원단을 제외하는 과정을 거치기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들은 전문적인 법조인들이 아니며, 그렇기에 일반적인 시각으로 봤을때에 그들은 전문성이 결여되었다라고 볼 수 밖에 없는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랜킨이 배심원들을 대하는 태도는 당연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가 더스틴 호프만(윌델 로役)과 화장실에서 나누던 대화에서 이를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배심원들 모두가 솔로몬 왕이라도 되는줄 알고 있나? 대부분은 쇼파에 앉아서 케이블TV 보는데 만족하지. 사람들은 진실, 정의, 또는 당신의 미국 방식에는 상관도 안한다고.' 때문에 영화에서는, 변호를 맡는 변호사가 중심이 되질 않고 배심원들을 매수하는 것이 원하는 평결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배심원 컨설턴트인 랜킨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랜킨도 어떻게 해보지 못했던 배심원, 니콜라스 이스터

 

 

그런 그는 최고의 배심원 컨설턴트로서 총기회사를 대리하여 총기사고 관련 재판을 맡게 된다. 극 중 내용을 살펴보자면, 총기회사를 대신하여 배심원 컨설턴트로 그가 일했던 것은 처음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총기난사사고 발생시에 피해자 가족이 총기회사에게 피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때 마다 그가 배심원 컨설턴트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런 일들을 지금까지 자신의 방식대로 일을 잘 처리해왔고, 총기회사에게 좋은 소식만을 전달해 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이 사건을 맡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한 배심원 컨설턴트라고 해도 재판 내에서 강력한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본인들에게 유익한 배심원들을 선별하여 그들로만 배심원단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명확한 방법이지만, 그리 쉬운일은 아니다. 한 눈에 그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 모두를 판단한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배심원단 내에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만한 인물을 심어놓거나, 자신의 편이라고 확신이 드는 사람이 배심원단 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영향력일 끼칠 수 있는 사람이면서 그 사람이 배심원단을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한다면 이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다. 사실상 재판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세 번째는 배심원들의 약점을 잡아내어, 그것으로 협박을 하거나, 더 좋은 조건으로 그들을 회유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런 일들을 지금까지 잘 해왔다. 그랬기 때문에 수 많은 재판들에서 총기회사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낸 것이고, 총기회사는 3천만 달러에 육박하는 돈을 주면서까지 그에게 이 재판을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 법이다. 그는 '본인에게 유익한 배심원을 선발한다'라는 대원칙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를 선발한 것이다. 바로 존 쿠삭(니콜라스 이스터役)이다.

 

그 옛날 랜킨이 맡았던 사건의 피해자측 이였던 이스터

 

 

물론 랜킨이 처음부터 이스터를 확실하게 자기쪽 사람으로 여겨 배심원단에 추가하려고 했던것은 아니다. 다만 이스터가 배심원 자격을 판단받기 위해 변호인으로부터 심문받던 도중 판사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행동을 범했고, 판사는 그 때문에 '신성한' 배심원의 의무를 그에게 강제적으로 부과하려고 했다.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그를 배심원단에 넣어도 된다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지만, 랜킨 역시도 이스터를 완전히 부정한것은 아니기에 그의 실수도 어느정도 있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스터의 이런 일련의 행동들이 모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실행에 옮긴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번 총기사고와 마찬가지로, 이스터의 여자친구의 동생 역시도 총기난사사고를 통해 사망했고, 총기회사와의 재판에서 패배했다. 게다가 그 당시 총기회사측의 배심원 컨설턴트가 바로 랜킨이였던 것이다. 때문에 이스터는 랜킨에게 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신원을 바꿔가면서까지 그가 맡는 모든 재판에 배심원으로 들어가려 했었지만 실패했고, 끝내는 이번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랜킨은 이를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재판의 패배라는 결과가 자신의 손에 놓여져 있는 순간이였다. 지금까지 배심원을 잘 컨트롤 하면서 모든 재판을 승소로 이끌었던 그이지만 이스터로부터는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 곧 진리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영화는 시종일관 총기판매 규제를 찬성하는, 이스터로 대표되는 쪽을 선(善), 그리고 그에 반하는, 랜킨으로 대표되는 세력을 악(惡)으로 분명하게 놓고 흘러간다.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세지는 분명하다. '총기 규제는 필요하다.' 물론 이런 메세지는 나 역시도 공감하는 바 있기에 이 사실에 대해서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영화가 그 메세지를 전달하려는 방식은 다소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선과 악을 분명히 내려놓고 영화는 출발한다. 물론 상대 피해자 측과, 그 변호인이 선이라는 판단은 내릴 수 있겠지만, 영화가 끝나기 전 까지는 이스터가 선이라는 판단을 내릴수 없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주려는 메세지는 명확하다. 결국은 총기 규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영화에서는 이를 최소한의 의미있는 토론을 통해서가 아닌,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로만 이야기를 풀어갔다.

 

다만 그런 모습속에서 배심원제의 모순을 다시 한번 찾아볼 수 있다. 어쨌거나 결말은 피해자측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그들이 승리를 쟁취한 방법은 랜킨의 그런 방법들과 다를바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도 이를 알았던지, 재판 후 랜킨이 '어떻게 승리했냐'라고 묻자 이스터가 '난 그저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이 따라 투표하게 했을 뿐이다'라며 언급하게끔 하지만, 이는 사실 어불성설이다.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내기 위해서 그는 자신과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던 다른 배심원의 신뢰도를 하락시켰고, 배심원단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굳어지자 곧 자신의 생각을 어필, 모든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냈으니 그 역시도 결국은 랜킨과 비슷한 방법으로 승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영화에서는 배심원단이 총기회사의 잘못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을 매우 선한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것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봤기 때문에가 아니라 이스터의 감정적인 언사에 휘둘린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영화는 랜킨이 파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직 미국의 사법제도는 살아있다'라는 것을 한편으로는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도달하는 결론은 외려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는 그들만의 가치관, 그리고 신념으로 대변된다. 이런 것들은 오랜시간 흘러오며 생겨난 것들이라서 사실 잘 변하지 않는다. 결국 총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배심원단으로 지명된다면 총기회사의 잘못을, 그 반대의 경우라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쪽으로 평결이 낼 것은 당연지사다. 변호인이 배심원단의 자격을 심문하는 것 역시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자신에게 유리한 배심원으로 배심원단을 꾸리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배심원단이 내린 평결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 모두들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듯이, 그리고 영화를 통해서 살펴봤듯이, 다수의 의견이 꼭 진리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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