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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ovie

굿바이 레닌 : 도구로써의 이념, 목적으로써의 이념, 그리고 이상향

by 카쿠覺 2013. 2. 23.

 

지구상에는 여러 이념들이 존재해왔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를 국한해서 생각한다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두 가지의 이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두 이념은 방법에만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본질적으로 같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더 잘 살게끔 만드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이상향은 이해하겠는데 자본주의는 왜 그러느냐고 되물어볼 수도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어버이라 불리는 아담 스미스가 했던 말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국민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데 그 나라가 부유하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 이상향으로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서 설득 당하게 되면 한 개인은 자신의 삶의 지표로써의 이념을 받아들인다. 물론 자신이 태어난 국가의 특성으로 인해 그러한 이념을 주입받는 경우도 있다. 선택하건, 강요받건 간에, 그런 이념을 받아들여서 살다보면 어느새 부턴가는 회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과연 이것이 맞는 것인가? 지금 이곳이 내가 소망하던 이상향인가? 우리는 이념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살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많은 이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유토피아를 매력적으로 대중들에게 설명하지만 언제나 현실과 이념사이에서는 좁히려야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간극은 다른 이념과 자신이 믿는 이념의 차이를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다른 이념을 받아들일 때 생기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편 가르기'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

 

 

앞선 단락에서는 이념을 개인이 선택한다고 표현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이 출생한 국가에 따라서 선택받기 마련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이념을 애국심이라는 출구로 표출시키고, 국민을 단합시키는 데에 이용하기도 한다. 이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나, 자본주의 국가라고 하여 예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정도가 약할 뿐이라는 표현이 옳겠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쭉 살아가다보면 어느새 부턴가는 이념과 자신의 조국을 동일시하기 시작하는 경우도 더러 생긴다.

 

그런 와중에 독일과 같이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되는 형태의 통일과정을 겪게 된다면 어떨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통일이 된 것에 대하여, 같은 민족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로가 하나가 된다는 사회 대통합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는 한 이념이 다른 이념에게 일방적으로 패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테다. 때문에 동독 주민들은 서독 주민들로부터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두 나라가 대의를 위해 서로 손을 맞잡은 형태를 취했지만 실상은 동독의 패배였으니 말이다.

 

그런 현실 속에 주인공인 알렉스(다니엘 브륄)의 어머니인 크리스티 안네(카트린 사스)가 놓여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경찰에게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8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녀가 정신을 잃는 동안, 동독이 붕괴되고, 서독에게 흡수되는 일들이 생겨난다.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이상적인 나라의 모습을 항상 꿈꾸던 이상주의자인 그녀가, 미처 준비할 시간도 없이 자신의 이념이 붕괴된 현실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심장이 약해진 어머니를 위해

 

 

안네가 받아들일 충격은 클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현실이 이러이러하다고 이야기 해 줄 수도 있을법하다. 하지만 알렉스는 의사로부터 '어머니의 심장이 약해져 조그만 충격도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라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결국 아들인 알렉스는 어머니에게 동독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결정하고, 이미 대부분의 생활양식조차 서독화 된 상태이지만, 어머니가 쓰게 될 한 칸의 방이라도 동독시절의 모습으로 꾸미기로 한다.

 

방만 꾸미고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의 앞에 놓인 과제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TV 방송, 라디오 방송같이 인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으며, 통일된 후 사라져버린 동독기업의 제품을 찾는 어머니의 입맛을 맞추는게 여간 쉽지가 않다. 그러나 TV 방송의 경우에는 자신의 직장 동료와 함께 거짓 뉴스를 촬영하기도 하고, 사라져버린 음식은 쓰레기통에서 그 옛날의 용기를 찾아서 내용물만 바꿔놓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다하여 완벽한 연기를 하게 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더욱이나 주변사람들도 알렉스의 거짓말에 더 이상 같이 행동해줄 여력도 없다. 하지만 알렉스는 지금까지 거짓말을 해왔는데 아니라고 하자니 어머니가 받을 충격이 더 클 것만 같아 결국 진실을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그는 어머니가 죽는 그 순간까지 거짓말을 했고, 그의 어머니가 품고 간 동독을 그녀가 꿈꾸던 이상향으로 남아있게끔 만들었다.

 

과연 안네는 마지막까지 아들의 거짓말을 믿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과연 끝까지 아들의 거짓말을 믿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랬을 것이라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영화는 전지적 시점을 취하고는 있으나 중간 중간에 아들 알렉스의 내레이션을 삽입함으로써 아들의 시점에서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때문에 그가 병원을 비웠던 시간에 라라와 안네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영화에서는 잠시나마 라라가 안네에게 '걱정 마세요. 하나가 된 거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후 아들이 만들어온 거짓 개국기념일 영상을 함께 보며 안네는 아들이 만들어온 영상은 보지 않고 아들만 빤히 쳐다본다. 열혈 공산당원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그녀는 수많은 사회 활동에 참여했고, 어린아이들의 교육까지 맡았던 점들로 미뤄봤을 때 그녀가 이 영상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녀가 라라로부터 모든 사실을 다 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충격을 받지 않고 아들만 바라본다. 분명 동독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안네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믿던 신념이 사라졌다는 허탈함과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동독이 무너졌어도 자신에게 소중한 가족들이 여전히 옆에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고, 또한 그런 가족들이 자신을 그만큼 걱정해준다는 사실에 그녀 역시도 그 분위기에 맞추기로 했다고 이해하는편이 맞아 보인다.

 

이 부분에서 더 나아가면, 그녀가 과연 열혈 공산당원이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게 된다. 영화에서 그는 서독으로 망명한 남편으로 부터, 자신을 따라 서독으로 오라는 편지를 3년 동안 받은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것은 서독으로 망명하기 위해 비자를 신청할 경우 '당으로 부터 자녀들을 뺏길 수도 있기 때문에'였다고 그녀 스스로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서독으로 망명하지 않고 동독에 남고, 그리고 열혈 공산당원이된 것은 어찌 보면 자신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서 라고도 볼 수 있다. 남편이 떠난 실의를 견뎌내는 데에 가장 큰 힘이 된 것도 자신의 아들인 알렉스였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구로써의 이념, 목적으로써의 이념, 그리고 이상향

 

 

세상에는 수많은 이념들이 존재하고, 그 이념들은 현실의 부족한 부분을 꼭 해결해주겠다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많은 대중들은 이에 혹해서 그들을 지지하게 되지만 변하는 것은 사실 없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이런 모습을 골드스타인이 썼다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중간계층은 상위계층으로의 계급상승을 위해 자신들이 '정의의 사도'라며 하위계층을 설득, 혁명을 일으키나 하위계층은 여전히 하위계층으로 남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이념을 쫓는다. 우리가 몰라서일까? 물론 그 순간에는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변하는 건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가슴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쫓는 이유는, 갑자기 그 모든것을 부정할때 오는 허탈감을 피하려고 하거나, 또는 어차피 모두가 똑같다면 새로운 이념을 쫓을 수고를 할 필요가 있겠냐는 판단에서 오는것일수도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항상, 자신만의 이상향을 꿈꾸고, 그런 곳에서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보자. 영화 속에서 아들 알렉스의 눈에 의해 '열렬한 공산당원'으로 묘사되는 안네는 한편으로는 '이상주의자'이다. 그녀가 쫓는 이상은 가치 있는 것 이였지만, 단지 너무 '이상적'인 것을 쫓는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끝내는 교사직을 잃기에 이른다. 그런 그녀에게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과연 무엇을 의미했을까? 자신이 꼭 믿고 신봉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것이었을까?

 

 

우리가 더 나은 세계를 보기 위해 이념을 쫓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주장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이념은 어디까지나 이상향을 이뤄나가는 도구로만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념 그 자체를 신봉하고는 한다. 하지만 도구가 아니라 이념 자체가 목적이자 의미가 되는 순간 그 이념은 더 이상 이상향을 쫓을 수 없다. 그 이념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현실과 타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유지하겠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수많은 학살과 비인권적인 행동들이 이뤄지는 것을 쉽게 엿볼 수 있다.

 

현실이 이념에 맞춰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 현실에 맞춰나가는 순간 그 이념은 이상향을 쫓아갈 수 있다. 안네는 공산당원인 한편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목적이 아닌, 자신의 이상향을 쫓아갈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기도 했다. 아들인 알렉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렇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동독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계속 한것일 테지만.

 

그러나 어머니인 안네는, 그 사실을 마지막에는 모두 알게 됬으면서도 아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모르는 척 속아준 채 세상을 떠난다. 그렇다면 그녀를 열혈 공산당원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안네를 정확히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보다는, 그녀는 화목하게 지내는 가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상향을 쫓았고, 그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척 했다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그녀에게 이념은 그저, 자신이 상상하는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었을테다.

img. ⓒ good bye, Lenin!,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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