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Movie

러블리 본즈 : 가족을 보내야 하는 죽은 자, 죽은 자를 보내야 하는 산자

by 카쿠覺 2013. 3. 2.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성폭력범죄의 피해자 1만3천여 명 가운데 2천5백여 명의 피해자가 15세 이하의 미성년자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2008년부터 2012년 6월까지 발생한 성범죄 피해자 8만 5천여 명 중 15세 이하의 피해자는 약 만천여명에 달한다. 전체 성범죄 피해자 중 15세 이하가 차지하는 비율은 다소 낮아졌으나, 성범죄의 사건수가 실제로는 증가했으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나날이 증가하고, 이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성범죄의 가해자들은 대부분 피해자들과 어떤 연관도 없는 모습을 보이나,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경우 그 가해자가 피해자와 안면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웃사람인 경우가 가장 많고, 그 외에 가족, 친척 등 가해자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인간으로서는 범하기 힘든 비도덕적인 범죄일 테지만, 가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더더욱 비정상적이라며 손가락질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아동 성범죄자들에게 높은 형량이 부과되기를 바란다.

 

높은 형량이 부과되기 바라는 것은 응당 그 죄의 값을 치르게 하고 싶은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결과겠지만 대개 이러한 생각 속에는 피해자 가족들의 삶은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야 말로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반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 '러블리 본즈'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영화는 수지가 살해되고,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수년이 지난 다음, 이제야 다시 정상의 삶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다시 수지를 회상하면서까지 범인을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저 둬야만 하는가라는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14살, 나는 살해당했다.

 

 

이전 단락에서 쭉 언급했지만,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미성년자 성범죄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14살의 어린 소녀인 수지 샐먼(시얼샤 로넌 분)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이웃인 조지 하비(스탠리 투치)에 의해 강간 살해당하고, 수지의 부모와 경찰은 범인을 찾고자, 그리고 사라진 수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끝내는 찾지 못한다. 그 후 옥수수 밭에 덩그러니 놓인 수지의 털모자를 보고서는 수지가 살해당하고 시신이 유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가족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수지의 아버지인 잭 샐몬(마크 윌버그)은 그 모자를 보고서도 '그게 수지 것이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라고 되묻고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인 잭이 수지와 함께 병속에 배를 넣던 추억을 잊고자 그 병들을 모두 깨버리려고 하지만, 수지와 함께 가장 최근에 만들었던 그 병은 깨지 못한 채 가슴속에 품고 그저 눈물을 흘리고 마는 장면을 통해, 영화는 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가족들, 특히 아버지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는 딸의 모습 역시도 잘 그려내고 있다. 죽어버린 딸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느냐라는 생각도 들 수 있을 테지만 이 영화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바로 그러한 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을 떠나보내야 하는 수지

 

 

가족의 구성원이 살해당하거나 실종된 뒤 남아있는 가족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구성원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을 보여주는 영화는 흔하다. 가족을 잃은 한 가장이 사회에 복수를 한다는 영화 모범시민이나, 총기난사사고로 인해 자신의 동생이 죽게 되자 총기회사에 이에 대한 응징을 한다는 영화 런어웨이 역시도 그런 내용 중 하나이다. 이런 영화는 이승에 남아있는 자들이 저승으로 떠나야만 하는 죽은 자를 보내는 과정에 있어서 느끼는 감정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 것처럼, 이러한 영화 속에서 죽어버린 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의 주인공은, 수지의 아버지인 잭도 아니고, 가해자인 하비도 아니고 바로 수지 샐먼 본인이다. 이는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흘러나오는 수지의 내레이션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단순한 내레이션이라면 아무렇지 않겠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스스로가 자신이 죽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를 살리면 오래 산다.'라는 할머니의 말이 결과적으로는 틀렸다며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1973년 12월 6일에 살해당했다고 하는 부분에서 이를 확인해볼 수 있다. 이런 내레이션을 통해서, 수지는 죽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지 계속 나올 것이라는 점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렇게 수지가 계속 영화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은 가족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한 채 이승에 미련에 남아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래 있었던 저승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 잠시 그 중간세계에 위치하게 된다는 전형적인 동양적 사후세계관으로, 한이 많아 죽지 못하고 이승에 남아있는 귀신들을 연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귀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한으로 인해 이승에 부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지만, 영화 '러블리 본즈'에서 수지가 머물게 되는 중간세계는 자신이 떠나보내야만 하는 이승에 남아있는 가족들과의 미약한 교감, 바라볼 수라도 있는 공간 정도로 묘사된다.

 

이 영화의 가장 특징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가족들을 떠나보내기가 미처 아쉬워서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는 수지가 있는 세계를 환상적으로 그려낸 점, 그리고 기존의 내용에서는 쉽게 엿볼 수 없었던,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의 공허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떠나보내야만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러 영화를 통해 쉽게 볼 수 있었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아쉬움을 엿볼 수 있을만한 영화는 그리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소 아쉬운 점은

 

 

영화는 여러 면에서 장점이 있지만, 그 만큼 허술한 점도 많다. 영화만의 장점을 부각시키며 내용이 잘 흘러가다가 갑자기 산으로 가기 시작한 기점, 즉 허술함이 드러나기 시작한 부분을 꼽아보라 하면 아마도 수지의 외할머니가 극에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수지의 외할머니를 등장시킨 의도가, 수지가 떠나간, 상처 입은 가족이 회복되는 모습을 그려주기 위함 이였다는 것이라는 점은 추측해볼 수는 있다. 영화가 전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가 그곳에서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도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등장한 후 영화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족이 치유되는 모습을 그리려면, 그 모습만을 그리면서 차근차근 이야기가 흘러가야 하는데 너무 뜬금없이 등장한 외할머니는 영화의 분위기 역시도 뜬금없이 다른 방향으로 보내버렸다. 잔잔한 분위기로 흘러가던 영화는 갑자기 어색하게 밝은 분위기로 반전됐고, 그렇다고 가족들의 분위기 역시도 밝은 분위기로 바뀐 건 더더욱 아니다.

 

또한 린지가 하비의 집으로 들어가 범행과 관련된 증거를 꺼내오는 장면 역시도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린지가 하비의 집에 잠입하여 관련 증거를 꺼내오고, 그 둘 서로가 쫓고 쫓는 장면은 한편의 스릴러 영화에 가까웠지만 굳이 이런 요소를 이 영화에 삽입했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영화가 주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린지가 증거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영화의 분위기가 또 급반전 된다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억지로 끼워 맞춘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을 보내야 하는 죽은 자, 죽은 자를 보내야 하는 산자

 

 

가족 중 누군가를 어디론가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형제나 자매가 아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면 이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군대와 같이 아주 돌아오지 못할 곳이 아니라 잠시 갔다가 돌아오는 경우라해도 떠나보내는 순간은 어렵고, 힘들기 마련인데, 영원히 보지 못할 곳으로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더군다나 수지가 떠나던 그 순간처럼,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면, 그 때의 마음은 또 어떠할 것인가? 자신의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일부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때의 그 공허함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보내야만 한다. 그게 산자의 몫이다.

 

영화 속 그들은 생을 달리한 수지를 떠나보내고 나서, 남아있는 자들이 어느 정도 정상적인 삶의 궤도 안에 들어왔을 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수지를 강간 살해한 범인을 다시 찾을 것인지, 아니면 지금 막 정상으로 돌아온 삶을 살아 갈 것인지를.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던 이 질문은, 사실 선뜻 쉽게 답할 수가 없다. 이런 어려운 질문은 영화 속에서는 린지라는 소녀의 어깨에 놓여지고, 린지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전적으로 외할머니에게 이임하게 된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아쉽고, 미련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는 이승을 두고 저승으로 떠나는 것 역시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비단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뿐만이 아니다. 산자에게서 잊히게 되는 죽은 자의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다. 누군가에게 잊힌다는, 그 쓸쓸함과 외로움이 바로 죽은 자가 이승을 잊지 못하고 저승으로 떠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일 테다. 그렇지만 산자가 죽은 자를 힘들게 떠나보내듯이, 죽은 자 역시도 산자를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것 역시도 죽은 자의 몫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산자와 죽은 자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잊힐 것을 두려워하고, 그로인해 서로를 쉽게 보내지 못한다. 하지만 가슴에 인이 박힌 서로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는 것이 아니라 옅어질 뿐이다. 이승을 떠나버린 수지를 잊고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고만 여겼던 수지의 엄마가 수지의 방을 찾아 '사랑한다, 아가야'라며 침대보를 갈아주는 것, 그리고 천국으로 떠나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만 있을 것 같던 수지가 '그동안 제가 엄마를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았어요.'라며 자신의 방을 찾아온 엄마를 절절히 추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img ⓒ. Lovely Bone, 2009.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