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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ovie

15분 : 물신화된 미디어, 수반되는 폭력성

by 카쿠覺 2013. 2. 9.

 

3S 정책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바 있을 것이다. 스포츠, 스크린, 섹스라는 세 가지의 S를 통해 대중들을 우민화 시켜 정치적 무관심을 낳고, 이를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이용하는 것이다. 권력의 탐욕과 부패를 상징하는 대명사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대중들은 결국 그런 3S를, 내지는 그와 유사한 것들을 쫓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돈이 중요한 오늘날 사회에서, 미디어에게 시청률과 구독률이란 곧 광고 수입의 증가, 즉 돈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끔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런 흐름을 통해 생기게 될 병폐는 앞서 언급했듯이 정치적 무관심에 따른 권력의 부패다. 때문에 미디어는 공영성을 추구해야 하는 의무를 준수해야 하나 반대로 그들에게는 언론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리인 표현의 자유 또한 함께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단지 대중들의 기대에 영합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지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의무도 있지만, 그럴 수 있는 자유 또한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면 사회의 정의는 어디서 실현되는가라는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헌법 제 37조에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중략)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제한할 수 있으며, (후략)'라고도 명시해 놓았다. 또한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는, 설사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 때에 따라서는 표현의 자유도 규제할 수 있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때문에 우리가 논의해야 할 부분은 미디어의 어느 수준까지를 표현의 자유로써 인정해야하느냐는 점이다.

 

어느 수준까지의 자유를 인정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위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수준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만들 것인지가 될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게 되면 그 수위를 체계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끔 법제화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영상물의 관람가 기준은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그 모든 것을 전담하게 되는데, 영등위에서는 등급 판정을 위해 '등급분류기준'이라는 세부기준이 정확하게 문서화 되어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이 아닌, 언론사에서 공익을 위해 제한받는 자유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정보가 누출될 수 있는 경우나, 그 내용이 반사회적이기 때문에 보도할 수 없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언론의 경우에, 과도한 자유의 제한은 곧 국민의 알권리 침해로 이어진다고 하여,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의 자유가 제한받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한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모든 경우에 대하여 언론의 자유를 이해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이는 영화 15분(15 minutes, 2001)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에디'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영화는 에밀과 올렉이 미국으로 입국한 후, 자신의 옛 동료를 만나 돈을 달라고 하나 주지 않자 자신의 화를 못 이겨 그들을 죽인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 와중에 올렉의 손에는 가게에서 훔친 비디오 캠코더가 있었고, 올렉은 에밀이 자신의 동료를 살해한 순간을 촬영하게 된다. 이들은 범행을 저지른 후 한 모텔에서 TV를 보며, 자신들이 미국에서 유명해질 수 있고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게 된다. 그것은 뉴욕 최고의 형사인 에디(로버트 드니로)를 살해하고, 그것을 영상에 담아서 매스컴에 뿌리는 것.

 

그들은 에디의 집을 찾아가 그를 살해하고,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던 도중에 탑스토리의 진행자인 로버트(켈시 그래머)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에디를 살해한 당시의 영상을 가지고 있으니 갖고 싶다면 백만 달러를 가져오라며 이야기 한다. 로버트는 자신 스스로를 에디와 절친한 사이였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는 그 테이프를 백만 달러를 주고 사오고, 그 비디오를 방송하기에 이른다. 에디가 살해당하던 그 순간의 자세한 내용이 미국 전역으로 전파를 타고 방송되게 된 것이다.

 

뉴욕 시민으로부터 최고의 형사라는 평가를 받던 에디가 어떤 범죄자들에게, 얼마나 잔혹하게 살해당했는지를 아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일 것이다. 때문에 이 비디오를 방송한 것에 대하여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방송한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꼭 에디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그의 처참한 마지막 순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달리 말한다면,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는 권리가 있는가?

 

'공적인'경우에 표현의 자유가 침해돼서는 안 되겠지만

 

 

개인이 사회 전체의 모든 일을 알고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세한 것을 모두 알지는 못하더라도 대략적인 내용마저 알고 있지 못한다면 한 개인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며, 사회적 합의를 이끌기 위한 토론 역시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내용들을 대중에게 보도하는 언론의 기능은 중요하고, 그들은 외부의 압력이나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보도해야 되는 내용을 취사선택해서는 안 되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해줄 수 있게끔 공영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 외압이나, 내지는 특정 기업이 해당 보도로 인해 손실을 입을 수 있다고 해서 보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 가령, 삼성전자의 불산 누출 사고가 기업의 이미지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하여 보도를 하지 못하게끔 막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앞 문단을 요약한다면, '사회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보도의 경우에 표현의 자유는 보다 폭넓게 인정되어야 하고,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이라는 판단은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다. 영화 15분에서 에디가 어떤 범죄자에 의해서 살해당했는지를 알리는 것은 빠른 검거를 할 수 있다는 공적인 측면이 존재하기에 유익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는 공개수사, 공개수배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그러나 에디가 '어떻게' 살해당했는지는 크게 유익하다는 판단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수법의 범죄가 있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고취시켜 사전에 대비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으나 이는 '모방범죄'의 우려를 생각해보면 그런 이익을 훨씬 뛰어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런 보도를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돈'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도구이며 사회의 공적인 이익을 증진한다'라는 미디어로서의 책무와 의무는 사라진지 오래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누군가의 소유물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때문에 결국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게 아니라 '소유주'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게 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대중들이 원하는 선정적이며 자극적인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게끔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물신화된 미디어가 도를 넘은 폭력성을 띄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는 이야기이다.

 

죽어가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던 올렉을 기억하라

 

 

올렉은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그는 미국에 오는 처음부터 카메라를 훔쳐서, 에밀의 범죄 현장을 카메라로 담는다. 그가 진정으로 카메라에 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는 극중에서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몇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비디오를 봐주기를 원했고, 그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올렉이 에밀에게 '미국은 폭력과 섹스를 원한다.'라며 말했던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만 달러로 올렉의 비디오가 팔렸고, 미국 전역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봤으니, 그는 그 비디오의 감독으로써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테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까지 영상으로 담기 원했고, 그는 그 순간을 스스로가 담기 위해서 죽은 척 연기를 하면서까지 담아냈다. 그러고 나서 결국 그는 죽었지만 말이다.

 

오늘날의 미디어 역시도 마찬가지다. 물신화된 미디어가 가져오는 지나친 폭력성이 사회 전체에 가져올 부정적인 영향력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클 테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지 미디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파급력은 단순히 대중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들은 그런 폭력성으로 인해 자신 스스로가 병들어 가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올렉은 끝까지 자극적인 영상을 담기 위해서, 스스로가 죽는 연기까지 취했지만, 결국 그는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죽었다. 미디어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폭력성으로 인해 미디어 스스로가 죽어버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봐준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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