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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ovie

일급살인 : 디마지오의 기록은 멈췄지만, 그들은 승리했다

by 카쿠覺 2013. 8. 3.


현대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형을 선고하는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그 이유에는 크게 죄값을 치룬다는 처벌의 목적, 또는 이와는 정반대로 수용자의 교화나 사회화 등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의 목적 중 어느것이 가장 중요한가?'라고 묻는다면, 물론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보다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마 이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 두가지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야 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둘 사이가 적절하게 균형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어떤 사회에서의 형벌의 목적이 단순히 징벌의 의미로만 존재한다고 가정해봤을 때, 이들이 만기출소 하여 다시 사회로 나왔을 경우 과연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을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도소는 그저 범죄자를 양산하는 곳 밖에 되지 않을테다.


물론 반박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무조건 교화의 측면만 강조되어야 하는가? 예를들어 교화의 측면만이 강조된 상황을 가정해보자. 즉 죄수들의 사회화를 강조하다 이에 따라 교도소에서 국민들의 혈세로 이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보장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러한 현상들은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줄 소지가 있으며, 나아가 범죄에 대해 크게 두려워 하지 않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으로 장려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면을 종합해 본다면, 교도소가 존재하는 이유는 평범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이지 단순히 범죄자들의 교화, 또는 형벌이라고 한정지을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려볼 수 있다. 무조건적인 형벌과 무조건적인 교화는 모두 사화에 악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굳이 둘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그 옛날의 함무라비 법전처럼 처벌의 목적을 강조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공감하나 '사소한 실수를 저질러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그런 내용을 적용시켜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즉 '그들에게는 관용이 필요하지도, 그리고 허락되지도 않는가?' 라고 나에게 물어온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고 싶다. 이에 대한 근거는 영화 '일급살인'에서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헨리 영의 5불, 제임스 스템필의 5불



영화 '일급살인'은 서두에서 논의한, 즉 '교도소라는 곳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이유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고, 이에 대한 답으로는 바로 영화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는 두 사람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보여준다. 이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바로 '5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이가 같은 한 개인이 똑같은 금액인 5불을 훔쳤을 때, 그에게 주어지는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 과연 인간이라는 한 개채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교도소의 존재 의미에 대한 주제를 던지고 있다. 물론 영화는 단순히 질문을 던지고만 있는 것은 아니라, 우리에게 이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도 함께 제시해 주고 있다. '단순히 처벌만을 강조하는 교도소는 오히려 더 악랄한 범죄자만을 양산할 뿐이다'라고. 단순한 5불의 좀도둑에서 끝내는 살인자로써 삶을 마감한 헨리 영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다만 영화는 이 부분에서 반박을 받을 여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결국 인간이 놓여진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곧 헨리 영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연쇄살인범들의 과거도 헨리 영과 마찬가지로 불운했었다고 하여 우리가 그들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것인가? 물론 연쇄살인범들의 불우한 과거는 국가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겪은 것이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만을 놓고 보자면 그 둘 사이는 크게 차이가 없다. 교도소 역시도 국가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통제된 사회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역시도 국가,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일급살인'을 단순히 그러한 테두리에서만 바라본다면 문제가 있다. 영화는 앞서 언급한것처럼 분명 '환경이 인간을 바꿔놓을 수 있다'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런 환경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된다는 점을 함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가 단순히 헨리 영을 사법제도의 피해자, 또는 불쌍한 한 인간으로만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부분은 두 가지 부분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하나는 혈기 넘치는 신참 변호사인 제임스 스템필의 모습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로 했던 헨리 영이 교도소장을 지목하며 알카트라즈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모습이다.


차라리 죽음을 원했던 헨리 영



작가 토머스 E. 글래디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알카트라즈는, 이 나라 감옥 체계의 턱뼈에 붇어 있는 시커먼 어금니이다'. 언젠간 빼내어야 할 곳, 알카트라즈는 없어져야 할 곳이라는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를 뻬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었다. 현실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속에서 만큼은 분명했다. 이는 그 어금니 때문에 자신이 통증을 느끼고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차라리 죽는게 낫다'라고 표현하는 헨리 영의 모습이기도 하고,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왜 굳이 이걸 빼려고 하느냐고 말하던 영화속 지도층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빼야 할 어금니였고, 결국 이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헨리 영에 의해 시작된다.


사실 헨리 영이 알카트라즈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던 배경에는 스템필의 역할이 주요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스템필이 아니라 다른 변호사가 왔다면 어땠을까? 헨리 영은 그저 사형에서 조금 감형받는 수준에 머물렀을 테고, 알카트라즈의 비밀 역시도 그곳의 던젼속에 영원히 묻혀있었을 것이다. 패기넘치는 신참, 그리고 정의로움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 스템필이 헨리 영의 변호사로써 법정에 설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알카트라즈가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일테다. 하지만 결국 어금니를 빼야하는 사람은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고, 이는 알카트라즈를 없애려면 결국은 헨리 영이 보다 적극적으로 재판에 임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알카트라즈로 돌아갈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원했다. 그가 돌아가서 받을 고통들은 헨리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냈고, 결국 그는 자칫 잘못하면 던젼속에 묻혀버릴 뻔한 그곳의 진실,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로 던젼속에서 아무런 의미없이 사그라들뻔 했던 자신을 밝히고, 구원해내기로 결심했다. 만약 영화 '일급살인'이 그를 단순한 피해자로만 규정하고 싶었다면 그의 용기있는 행동을 의미있게 다뤄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것일까. 그의 여동생일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갑자기 삶에 욕심이 생겨서일수도 있다. 그러나 헨리 영이 왜 자신의 몸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끝내 그는 알카트라즈에서 삶을 마감하고야 말았지만, 헨리와 스템필은 결국 알카트라즈를 없애는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작은 외침, 큰 울림



하지만, 아무리 헨리 영이, 그리고 스템필이 외친다고 한들, 그들의 목소리는 그저 작은 외침에 불과했다. 신문과 방송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크게 전달하고자 했던 스템필이, 그러한 시도를 한다고 하여 판사에게 주의를 받고, 또한 그가 법정에서 계획하고 시행하려던 많은 일들이 자신의 형으로 대변되는 다른 권력가들에 의해 빛을 발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헨리 영의 목소리는 아예 존재감 조차도 없었다. 그는 영화의 끝에 가서야 처음으로 법정에서 입을 떼고, 그 전까지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을 변호하고자 온 스템필에게도 처음에는 아무말도 하고 있지 않았으니, 이 둘의 조합으로 과연 알카트라즈를 없앨 수 있을까는 의구심마저 들 따름이었다.


그러나 의미있는 이야기는, 그리고 가치있는 이야기는 언젠가, 그 누구라도 들어주기 마련인 것이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영화는 우리에게 또 다시 전달해주고 있다. 이는 배심원단이 영화의 끝에 발표한 탄원서의 내용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판사가 던지는 말 속에도 잘 녹아들어 있다. '여러분은 지시서를 받았습니다. 피고인의 의지에 반한 경우의 유죄는 최하 3년의 형기를 글렌 소장이 주도하는 알카트라즈에서 마쳐야합니다. 여러분의 자비심 없이 일급살인 혐의로 인정되면 종신형이 선고될 것입니다.' 만약, 판사가 일급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고 말했다면 배심원단의 결론은 어떻게 내려졌을까? 결국 이는 의도적으로 판사가 배심원단에게 '일급살인 혐의를 인정하면 종신형을 선고할 것'이라고 미리 언지를 줌으로써 살의 없는 살인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극의 초반에 마냥 권위적이게만 보였던 판사의 이런 변화는, 헨리와 스템필의 작은 외침이 결국은 큰 울림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큰 울림'은 '큰 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진정성이 있을 때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디마지오의 기록은 멈췄지만, 그들은 승리했다.



영화속에서 조 디마지오는 꽤나 자주 언급된다. 헨리와 스탬필이 처음 나눈 대화의 주제이기도 하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주제이기도 하다. MLB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는 디마지오는 영화속에서 나온것처럼 56게임 연속 안타라는 대 기록을 가지고 있고, 그 외에도 마를린 먼로와의 관계 등 여러가지 부분에서 사람들에게 많이 각인되어 있는 선수다. 영화에서는 스탬필이 헨리의 동생을 찾으러 가는 부분속에 디마지오의 연속 안타 기록이 깨지는 내용을 라디오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데, 이는 헨리의 모습과 디마지오의 모습을 겹쳐 보임으로써 지금까지 재판을 잘 끌어오던 헨리와 스탬필이 결국은 대기록이 깨지고 마는 순간에 놓여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헨리와 스템필의 승리였다. 그러나 헨리는 결국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그들의 시도는 쭉 안타를 쳐내고 있었지만 중요한 순간에 결국 그 기록은 멈추고 말았다. 재판까지는 안타가 이어졌지만, 재판 이후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한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과연 승리라고 볼 수 있을까? 이를 승리라고 볼 수 있다면, 영화의 끝에 스템필이 말한 진정한 승리의 의미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비록 헨리는 죽고 말았지만, 그와 동시에 알카트라즈도 함께 죽었다는 사실이다. 조 디마지오의 56게임 연속 안타 기록이 비록 깨졌지만, 그 해 그가 MVP를 수상하고 나아가 양키즈가 월드시리즈를 우승했던 것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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