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철도 999》는 1977년 만화로 연재되어 그 이듬해인 1978년 TV 애니메이션화 되어 방송하였으며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총 2년 6개월 동안 TV 애니메이션으로 113화가 방송되었는데, 국내에서는 파일럿 형태로 1,2화 / 11,12,13화만 81년 10월에 방송했다가 반응이 좋아서 113화 전편의 수입을 결정, 그 다음해인 82년 1월부터 정규 편성되어 83년 1월까지 일요일 오전에 방송을 해 큰 사랑을 받았다. 그 후 1996년도에 MBC에서 재 더빙하여 방송하였고, 가까운 과거에는 MTV와 EBS에서 방송하게 되었었는데, 09년도 EBS 방송이 가장 최근의 방송으로, 이 방송분은 96년도 MBC의 재 더빙 판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애니메이션이 나온 지 30년도 더 된 2009년에 다시금 방송한 사실만 보더라도 《은하철도 999》가 어느 정도의 인기를 끌었으며, 또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을 만큼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것을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렇게 사랑받은 《은하철도 999》를 관통하는 내용들을 몇 가지 키워드로 축약시켜본다면 무엇을 꼽아볼 수 있을까. 아마도 유한함과 무한함, 내지는 인간의 기계화 정도가 되겠다. 철이가 메텔과 함께 은하철도에 탑승하여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결국은 안드로메다에 도착하여 무료로 기계 몸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의 중심 뼈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 화가 각각 독자적인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 서로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큰 그림에서 보지 않고 지엽적으로 한 두 편만 바라본다면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예컨대 3화의 경우는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논하고 있으며, 5화에서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원론적인 질문을 보는 이에게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은하철도 999》를 살펴볼 때에는 지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그림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즉, 애니메이션 전체 뼈대를 보거나 또는, 이마저도 불편하다면 시간 제약상 중심 내용만을 주되게 담을 수밖에 없는 극장 판을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전체적인 프레임에서 《은하철도 999》의 내용을 본다면 이 애니메이션이 다루고자 하는 진짜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하게 드러난다. 바로 기계 몸과 육신으로 대변되는 주류층과 비주류층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특히 이는 애니메이션의 시작과 끝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은하철도 999의 중심 줄거리

 

C62 2 steam locomotive at the Dream Train 1999 exhibition in Shinagawa Station - Wiki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은하철도 999》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때문에 먼저 줄거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앞선 단락에서도 언급했듯이 《은하철도 999》는 철이가 지구에서 기계 몸을 찾아 기계모성인 안드로메다, 프로메슘 행성으로 떠나는 이야기로, 철이와 철이 엄마가 그를 위해서 메가로폴리스로 발을 떼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 와중에 눈 덮인 길을 걷다 불행히도 철이 엄마는 기게 백작에 의해서 죽게 되고 철이는 혼자 남게 되는데, 운명적이게도 메텔 이라는 의문의 여성을 만나 은하철도에 탑승하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화 처음에서 언급되어 있는 애니메이션 전반에 대한 이야기, 바로 세계관이다.

 

서기 2221년(국내 판은 2021년), 지구의 우주교통기술은 눈부신 발달을 이루었다. 우주 철도는 우주의 끝까지 펼쳐져 우주열차가 매일같이 지구와 별들 사이를 왕복하고 있었다. 그 즈음 지구에는 초 근대적인 도시 메가로폴리스가 생겨나 알맞은 온도 속에서 사람들은 더위와 추위를 잊고 쾌적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기계 부품만을 교환하면 천 년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천년도 살아갈 수 있는 몸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메가로 폴리스에 살 수 있는 자들은 기계 몸을 살 수 있는 부자들뿐이었다.

 

때문에 아직 기계화되지 못한 보통 육신의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 외곽의 허름하고 어두운 빈민촌으로 쫓겨나 기계화 인간들로부터 온갖 천대와 박해를 받으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사이에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이 우주에는 공짜로 기계인간이 될 수 있는 별이 있고, 그 별에 가려면 《은하철도 999》를 타면 된다고. 이 소문을 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도 기계 인간이 되면 메가로 폴리스를 자유롭게 누빌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은하철도 출발지인 메가로 폴리스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드러나는 내용들은 굳이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계 몸은 그들이 가질 수 없는 부의 상징이자 지긋지긋한 이 빈민촌을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이를 위한 은하철도는 그들 삶에 있어서의 유일한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철이의 엄마가 죽어가면서도 아들에게 「꼭 기계 인간이 되어서 엄마와 아빠 몫까지 살아 달라」고 말한 것은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김불이가 자녀들에게 달나라를, 그리고 독일의 릴리푸트읍을 이야기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과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철이가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즉 성년이 아닌 소년이라는 것이다.

 

은하철도 999가 말하고 싶은 것들

 

An Express train 'Niseko' bound for Otaru, Hokkaido, Japan - Wiki


어떻게 보면 《은하철도 999》는 전형적인 성장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주인공을 어린아이로 설정함으로써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과정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그래서 왜 하필 주인공이 소년일까를 생각해보면 그 답이 비교적 쉽게 나온다. 그런 소년은 의지할 수 있던 유일한 존재인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메텔이라는, 의지할 수 있는 새로운 여성을 만나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철이는 여행을 하면 할수록 기계인간에 대한 회의감을 쌓아간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끝에는 기계인간의 모성인 프로메슘 행성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소년이 어머니에게 들었었던 마지막 말인, 「꼭 기계인간이 되어라」는 유언을 무시한 채 말이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여행을 시작한 철이가 끝내는 그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다소 의외이기도 하다.

 

하지만 철이의 이러한 독자적인 선택은 결국 한 소년이 그 만큼 성장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면 이미 예견되어 있던 결말이기도 한데, 애니메이션 전체에서 기계인간의 무한함으로 인한 부정적인 단면만을 계속해 보여주고서는 마지막에 “너 이래도 정말 기계인간이 되고 싶어?”라 되물었더니 냉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이로써 철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계인간이 되고자 할 때 운 좋게도 기계인간을 비관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던 덕분에 기계인간이기를 포기한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기계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한 소년에서 성장해 스스로 기계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청년으로 성장한 철이의 이러한 모습은, 미래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시종일관 회색빛의 우울함만을 고집해 온 애니메이션 속에서 빛나는 유일한 희망이기도 하다.

 

왜 기계인간의 포기가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은하철도 999》에서 나타나는 기계인간의 문제는 무한한 삶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기계인간 타락의 원인을 이곳에서 찾는다면 그들의 문제는 수정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계 인간의 존재 자체가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기계 몸도 결국은 녹슬고 교체해야하기 때문에 무한하다는 것은 난센스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일단 이를 상정한 채 미래 사회의 문제점을 찾는다. 이로써 최종적으로 지금의 사회는 기계인간들이 바꿔나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만약 기계인간이 이 사회를 고쳐나가고자 한다면 그들은 기계인간만의 특권인 영속성을 버려야만 한다는 이야기이고, 이는 결국 그들이 기계인간이 아니라는 것과 동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인간이기를 포기한 철이 만이 《은하철도 999》에서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계 몸과 육신이 상징하는 계급

 

The Kepler-11 planetary system, with at least 6 planets in short orbits. from NASA


그러나 만약 기계 몸과 육신이 단순한 선택의 문제였다면, 즉 「원한다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철이의 이런 여행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은하철도 999》에서 기계 몸과 육신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소망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富) 역시도 이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하철도 999》에서 그려지고 있는 시회를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에 대입하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그러나 돈이 중요시 되는 사회임은 틀림없고, 몇 몇 행성들의 모습을 보면 소설 「1984」, 「멋진 신세계」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회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한 이유는 은하철도 999의 사회는 계급이 고착화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죽고 그 위에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우리 인간도 그 당연한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가야만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 인간이라는 무한함은 이런 당연한 진리에 역행하였고 결국 이는 계급의 고착화로 이어졌다. 여러 국가에서 상속세에 큰 세금을 물려 사망하는 이의 재산이 온전히 대물림 되는 것을 방지하고 이를 통해 사회에 의도적으로 환원되게 만드는데, 이러한 단편적인 부분마저도 기계인간 사회에서는 소득의 재분배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소득격차가 계속해서 벌어질 것임은 자명하며,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결국 계급의 고착화를 낳았던 것이다. 끝내는 인간이 동물을 박제하듯 기계인간이 인간의 육신을 박제하고 수집하는 상태까지 이르렀고 이는 애니메이션의 1화, 철이의 엄마가 기계 백작에 의해 목숨을 잃고 나아가 박제되는 모습 속에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계 몸을 택하지 않겠다고, 그냥 인간의 육신으로 살겠다고 하면 그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인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이야기 하지만, 배고픔을 넘어선 당장의 생존 앞에서 그런 철학 논쟁은 실제 현실에서는 가당치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라는 이유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던, 그 때문에 자식에게 잘 해줄 수도 없었던 철이의 엄마가 삶의 끝자락에서 철이 에게 「기계 인간이 되어라」라고 이야기한 사실을 단순히 “오래 살아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보다는 「철이의 엄마는 철이가 주류 사회에 속해서 인간답게 살기를 바랐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연장선에서야 비로소 「철이가 끝내는 기계인간을 포기하고 인간의 육신을 선택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만 철이가 긴 여행을 통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답을 얻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 불합리한 사회에 자성 없이 승차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은하철도 999 : 인간의 기계化, 주류와 비주류

 

Canon | Canon EOS 450D | Pattern | 1sec | F/9.0 | -0.33 EV | 32.0mm | ISO-400 | 2009:10:20 21:43:23

Flickr ⓒ Stéfan : http://www.flickr.com/photos/st3f4n : CCL에 따라 인용하였습니다.


“안녕, 나는 너의 소년 시절의 꿈에 있는 환상일 뿐이야”

 

예전에 드라마 '공부의 신'에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일단은 공부해서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라 는 요지의 내용이 언급되었던 바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말이지만, 《은하철도 999》의 그것에서 미뤄 짐작해본다면 이는 「기계인간 사회의 모순을 고치고 싶다면 우선 기계인간이 되라」라고 바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기계인간 사회의 모순은 기계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재하기 때문에, 즉 기계인간의 영속성에 기인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그렇기에 철이는 주류로써의 삶을 포기한 채, 메텔없는 자신의 육신을 다시 은하철도에 태워 지구로 돌아간 것이다. 비주류, 즉 피지배층만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가지고서 말이다.

 

《은하철도 999》가 최종적으로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소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소설 「1984」에 나왔던 그것과 비슷하다. 「정의를 실현하겠다며 하위계층을 끌어들여 혁명을 일으킨 중간계층은 사실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단순히 그들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하위계층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이 목 놓아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해도 세상은 같을 것이라는 우울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하위계층이 스스로의 상태를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만 불합리한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기계인간이 아닌 인간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은하철도 999》가 던지는 메시지가 유효할까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로 인해 한편으로는 비극적이기도 하다. 지금도 맞는 말이라는 것은, 애니메이션 속 사회처럼 우리 사회가 암울하다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채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생각만을 따른다는 데에 있다. 좋게 말한다면 진영 논리겠지만, 사실상 이는 특정 집단을 '신봉'하는 수준이다. 따라서 「기계인간만이 옳다」라고 모두가 주입받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라도 해두는 것이 좋겠다. 기계인간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석하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현재의 기계인간은 단순한 지배층뿐만이 아니라 피지배층 행세를 하고 있는 지배층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Canon | Canon PowerShot S30 | Center-weighted average | 1/60sec | F/4.0 | +0.33 EV | 7.1mm | ISO-200 | 2003:08:12 10:57:44

Flickr ⓒ Hoon Jang : www.flickr.com/photos/monomato/ : CCL에 따라 인용하였습니다.


어두운 동굴 속 한줄기 빛은 너무나도 눈에 띄어서,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지 못하게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삶은 빛을 운명으로 믿으며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도 느끼면서 영유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철이가 운명 같던 기계인간을 포기하고 살아 숨 쉬는 육신을 영유하기로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