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범죄학과 좌파 범죄학


영화 일급살인은 알카트라즈 감옥을 없애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한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니 만큼,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다른 영화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일수도 있고,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기법적인 요소가 아닌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보면, 그리고 그 내용이 모두 사실에 기반을 둔 것임을 알게 된다면 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다. 이는 책 '공범들의 도시'에서도 잘 언급되고 있다. 책의 표현을 인용하여 이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좌파 범죄학과 우파 범죄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좌파 범죄학의 경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좌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범죄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바라본다. 앞서 언급한 영화 일급살인에서는 주인공인 헨리 영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유를 알카트라즈라는 감옥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고 보는데, 이러한 시각이 전형적인 좌파 범죄학이라고 보면 된다. 이는 영화 속 변호사인 스탬필이 법정에서 주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실제로 영화가 다루고 있는 가장 주요한 내용인데, 영화 속에서는 헨리 영과 스탬필이 비슷한 유년 시절에 적은 돈을 똑같이 훔쳤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같은 죄를 지었지만 누구는 살인자가, 그리고 누구는 변호사가 되었다는 점을 비교함으로서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우파 범죄학의 경우, 어떠한 범죄가 사회 시스템적인 결함으로 발생한다고 보지 않고 개인의 정서적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도벽이 있는 사람이 물건을 훔친다거나,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된 싸이코 패스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좌파 범죄학도 우파 범죄학의 시각에 동의하나 다만 범죄자들의 범죄 원인이 된 정서적 문제가 결국은 사회적 결함에 의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우파 범죄학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를 우생학적인 시각으로까지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은 금물이다. 단지 우파 범죄학은 범죄에서 '사회에는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좌파 범죄학을 반박하기에는 충분하다. 같은 사회 제도 속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온 경우에도 누구는 범죄자가, 또 다른 사람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책 속에서 표창원 전 교수도 마찬가지로 '외적 요소들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사회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외적 요소들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알카트라즈가 없어진 옛날의 사례를 통해, 이미 외적인 요소로 인해 범죄자가 양산될 수도 있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알카트라즈는 형벌의 과함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일 뿐, 우리 사회에서는 의미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본인 역시도 이에 약간은 동의하는 바이나, 표창원 전 교수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그는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의 결함과 문제가 또 다른 공범과 또 다른 범죄자를 양산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


이미 일어난 범죄를 완벽하게 수사해낼 수 있는 경찰이 완벽한 경찰일 것인가. 아니면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경찰이 더 완벽한 경찰일 것인가. 사실 그 둘 모두를 할 수 있는 것이 완벽한 경찰이겠지만,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경찰은 후자 보다는 전자의 것에 보다 중심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표창원 전 교수는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경찰이 무능력하다, 사법 시스템이 부실하다가 아닌, '경찰과 사법 시스템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여러 반례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결국은 이 한 문장이다. 부의 유무가 죄의 경중을 좌우한다.

 

물론 그가 언급하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재벌 총수나, 정치계의 유력자, 또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친일 행동으로 금권을 만든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은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로는 아마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또 집단과 동화되려는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독특한 성향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인지 정상적으로 부를 축척한 사람들에게도 화살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일전의 지존파 사건만 보더라도 가진 자를 향한 비뚤어진 시선이 어떤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부를 기준으로 한 이분법적인 분리보다는, 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정당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가? 어떤 방법으로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일단 갖는 게 중요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는 얼마 전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 설문조사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해당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4%가 '10억 원을 준다면 징역을 1년 정도 살 수 있다'라고 답했던 것이다. 청소년들이 이러하니, 청장년층은 어떨 것인지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다.

 

책임감은 n분의 1이 되기 마련


“1964년 3월, 뉴욕 주 퀸스 지역 도로에서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20대 여성이 정신이상자에게 35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노비스가 살해되는 35분 동안 뉴욕 도로 인근 집에는 38명이나 되는 목격자가 있었다. 제노비스는 필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38명의 목격자 중 누구도 제노비스를 도와주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많은 심리학책이나 프로파일 관련 서적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노비스 사건이 있다. 3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인 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단 한명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책임감은 본래 사람의 숫자에 반비례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군 복무 시절이나 사회에서 응급 처치법을 배워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환자를 발견한 후 119에 신고를 부탁할 때, '꼭' 누군가 한 명을 지목하여 부탁하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데, 이 역시도 제노비스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나온 이야기다. 불특정 다수에게 신고를 부탁하면, 그 누구도 신고해주지 않는다.

 

다시 제노비스 사건으로 돌아와 보자. 만약 당신이 그 때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고, 하지만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자. 결국 당신은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는 것을 방관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럼 당신에게도 죄가 있을까? 형법상으로는 죄가 없다. 설령 그런 죄목이 있다고 해도 너무 급작스럽고 당황스러워 신고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공범인, '공범들의 도시'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내실을 들여다보면 분명 어딘가는 상해있고, 누군가에 의해서 들어내져야 함은 분명하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원과 전공노의 대선 개입, 여야를 막론한 전대의 친일 행적 등은 과연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비정상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작금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 관심 없이 이들을 흘려보낸다. 어차피 바뀔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을 것임을 지난 시간들을 통해 꾸준히, 그리고 쭉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다던 국민의 정부나 참여 정부 역시도 정권 말부터 불법 대북 송금이나 비자금 논란에 꾸준히 시달려왔고, 사대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부했던 전 정권 역시도 막상 들여다보니 문제들이 상당했다. 한번 찍었던 사람이 문제되어 다른 사람을 찍어도 봤는데, 별로 변화가 없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것이 새삼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치관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사회적 평가의 기준이 정당 한가, 그렇지 못한가와 같은 방법론적인 태도는 온전히 배제한 채 단순히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와 같은 정량적인 평가로만 그친다면 그 누가 정당하게 살아가려 하겠는가? 그리고 비단 고위층에서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덧 우리 삶 속에서도 페어플레이는 실종된 채 반칙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회사 입사 지원서의 자기소개를 대필하거나 베껴 쓰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대학 입시나 특목고 진학 시에 작성하게 되는 자기소개서를 부정한 방법으로 작성할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단순히 목도하고 없는 일이던 것처럼 넘어가는 것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사회 전체에 퍼질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제노비스 사건에서 신고하지 않은 이들은 형법상으로는 죄가 없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가 공범이다. 오늘날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을 공범이라고 부르기 전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한번 바라보자. 우리는 공범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가 공범인 '공범들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공범들의 도시 - 8점
표창원.지승호 지음/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