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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난장이와 굴뚝, 그리고 달나라

by 카쿠覺 2013. 7. 20.


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처음 세상의 빛을 본게 1976년이니, 햇수로 따지면 벌써 약 40년의 시간이 흘렀다. 비록 지금은 없지만, 그만큼 오래된 책이 처음 내 책장으로 들어오게 된것이 초등학교때이니, 난쏘공을 접한 햇수를 따져보면 책의 나이만큼이나 꽤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그 때는 책을 사놓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다.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처음 내용인 뫼비우스의 띠를 읽다가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난쏘공을 다시 읽게 되었고, 그 속에서 난쏘공이 전하려는 의미를 분명하진 않지만 조금이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2005년 즈음에 블로그를 통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대해서 서평을 올렸었다. 그럼에도 책을 다시 읽고, 2013년에 새로이 서평을 올리는 것은, 아직도 우리사회는 난쏘공이 던지고 있는 화두를 해결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증으로써 여야 모두가 핵심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경제민주화를 꼽아볼 수 있겠다. 결국 경제민주화도 난쏘공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해결책의 일환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하다. 난쏘공의 배경이 되고 있는 유신체제하의 개발독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산물이고, 이러한 프레임을 깨고 경제민주화를 이뤄내겠다는 것은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까지 잔존해 있는 이러한 모든 시스템이 박정희 전 대통령만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을 테다. 즉, 이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정권의 업보이고, 누군가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흐름의 시작을 만들었던 사람의 딸이 이 시스템을 고쳐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결자해지라고도 평가해볼만 하겠다.


이러한 경제민주화와 더불어 '갑에 대한 을의 반란', '1%에 대한 99%의 시위'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지는 오늘날의 흐름들은 분명 난쏘공이 전하려고 했던 40년 전의 그 메시지와 맥을 같이한다. 이런 다수의 외침은, 예전의 그 때와 비교했을 때 현재는 다소 나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핍박받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하다. 즉, 난장이들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독일의 릴리푸트읍, 그리고 난장이 아버지가 소망하던 달나라는 아직 우리 곁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장이 : 산업사회속의 불구(不具)



난장이가 소망하던 달나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보기에 앞서 먼저 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의 난장이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난쟁이의 개념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소설 속 난장이(김불이)는 키가 117cm에 몸무게가 37kg으로 묘사되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는 난장이가 자리하고 있던 당대의 사회적 지위를 그의 키를 통해 상대적으로 나타낸 것일 수도 있을 테다.


즉, 소설 속 난장이는 난쟁이의 신체적 의미로써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장애를 나타냄과 동시에, 그가 후천적으로 얻게 된 사회적인 장애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를 바탕으로 보면, 어느 사회를 가더라도 선천적인 장애를 가진 이가 일반인과 같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당시의 개발독재 시대를 비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얻게 된 후천적인 장애가 과연 사회의 잘못인지, 아니면 그의 선천적 장애로 인해 생겨난 것인지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정상적인 사회는 약자를 배려해야 할 의무와 책무가 있다는 점으로부터 당시의 사회를 비판할 수는 있을 테다.


때문에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은, 선천적으로 장애가 없음에도 후천적으로 그들이 장애를 가지게끔 만들어 버리는 당시 사회의 모습일 테다. 이는 난장이의 자녀들인 영수와 영호, 영희, 그리고 그의 부인을 의미하고, 보다 넓게 본다면 은강시에 근무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장이가 의미하는 것은 난쟁이가 의미하는 선천적인 불구의 의미라기보다는, 산업사회와 개발독재라는 거대한 프레임 속에서 강제로 그들의 삶을 거세당한 채 후천적인 이유로 산업사회속의 불구로만 살아야 했던 모든 이들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무너지는 집, 그리고 공구 가방



한 개인을 사회적인 불구로 만들어 버렸던 당시 개발독재시대의 비정함과 몰인정성이 소설 속에서 가장 잘 표현되고 있는 부분을 한 장면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난장이의 집이 철거되던 그 순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인상 깊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장면들은 무형적인 것으로써 그들을 괴롭히지만, 그와는 정 반대로 집을 철거하는 장면은 가장 직접적으로 난장이 가족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평소에는 먹기 힘들던 쇠고기를 가지고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는 장면은 그들의 모습을 더욱 처연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마지막 집이 무너지기 직전 난장이가 집에서 꺼내오던 공구가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난장이의 공구가방이 의미하는 바는 벗어날 수 없는 그의 장애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서커스를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다시 공구가방을 메고 일을 찾아 나서는 그의 모습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그는 이 공구가방을 원해서 챙긴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메고 있다는 의미가 되겠는데, 이는 그의 불행한 현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산업사회의 불구로 그려지고 있는 난장이를 묘사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런 공구가방을 마지막 집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가지고 나온 것은 현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도시 재개발의 목적이 이전의 것을 허물고 양질의 삶을 가져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하면, 집을 철거하는 행동은 새로운 출발의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난장이의 집은, 그가 자신의 공구가방을 가지고 나올 때부터 철거가 시작되는데, 이는 결국 앞서 말한 것처럼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의 표현이자, 재개발의 목적과 소설의 그것은 굉장히 유리되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아무리 개발을 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결국 공구가방을 진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굴뚝 : 한명만이 더러워질 수는 없다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대하고 있는 방법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대개의 사람들이 나와는 아닌 일 정도로 생각하기 마련이며, 또한 이들을 고용하는 고용주들 역시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한 상생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은 지금도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아예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고용주는 노동자들을 구원해주는 사람, 또는 봉건적 시대의 지주와 같은 수준으로 자신을 올려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쏘공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병을 통해서 말이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병의 공통점은 안과 밖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클라인 병도 결국은 뫼비우스 띠를 면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뫼비우스의 띠만 생각해보자. 한번이라도 이 띠를 만들어봤다면 알겠지만, 이 띠는 특정한 점에서 면을 따라 선을 그리기 시작하면 두 바퀴가 돌아서야 처음 선을 시작한 곳으로 돌아온다. 앞면과 뒷면이 하나처럼 이어져있기 때문에 가능한데, 이는 결국 안과 밖을 구분 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책에서는 이러한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병의 특징이 곧 우리의 세상과 같다고 보고 있다.


이는 굴뚝을 청소하러 들어간 두 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쉽게 설명하고 있다. 함께 굴뚝을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한 사람만 더러울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곧 고용주와 노동자를 이분법적인 사고로 구분 지으면 안 되고 둘 모두가 서로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난장이가 세상을 비관한 채 벽돌 공장 굴뚝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다 버릴 때, 난장이보다 키가 크다고 하여 담장 속에서만 머무른 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세상은 결국 한편이라는 것.


굴뚝에서 달나라로 날리는 종이비행기



변화할 수 없는 삶속에서 그는 결국 벽돌 공장 굴뚝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이 꿈꾸던 세상은 있었다. 소설 속에서 달나라로 나타나는 그곳이다. 그곳에는 사랑만이 가득하고, 필요 이상의 부를 축적하는 자는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세상은 자칫하면 이념 논쟁으로 빠질 수 있다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서로가 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현실세계에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일까. 소설 속에서도 그곳은 '달나라'라고, 지낼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라는 점을 은유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이를 적정선에서 타협하여 실현해보고자 하는 노력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마을단위에서 농번기에 이뤄지던 품앗이나 두레 등이 바로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이를 실현하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전적으로 공동체라는 단위가 커져가는 현상에서 출발한다. 공동체의 크기가 거대해지면 거대해질수록 소설 속 달나라는 실현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사회속의 가장 작은 공동체이자 기본이 되는 가족을 살펴보자. 그 속에서 재화는 비록 한정되어 있을 지라도 그 곳의 모습은 그가 꿈꾸던 달나라와 가장 닮아있다. 아주 큰 국가 단위의 공동체는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다. 그러한 형태가 결국 실패로 귀결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큰 단위의 공동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공동체도 결국은 누군가가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통제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또한 자리가 갖는 특성상 다른 이보다 많은 재화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큰 단위의 공동체의 정상작동은 무엇보다도 공동체를 관리하는 이들의 도덕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기업이라는 공동체에서도 유효하다. 결과적으로 그가 달나라를 꿈꾸며 날렸던 종이비행기와 쇠공이 결국은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처럼, 현실적으로 그가 꿈꾸던 세계는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등지고 자살했듯이, 그리고 회사의 사장을 죽이려고 했지만 죽이지 못하고 끝내는 다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말이다.



하늘 높이 쏘더라도 결국 쇠공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구에 사는 이들이 이상적인 세계인 달나라로 쇠공을 쏘아 올리기에는 수많은 것들이 턱없이 모자라다. 그런데 간혹 이들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힘든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이전의 쌍용차 사태에서도 봤던 것처럼, 그들을 위해 나선다고 한다는 정치권들도 결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 급급할 뿐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왔던 내용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중간계층은 '정의'를 지킨다며 하위계층을 끌어들여 혁명을 일으키나,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지위상승'을 위해 혁명을 일으켰을 뿐이다. 결국 그들이 상위계층으로 올라가 지위가 상승된다 하더라도 하위계층은 여전히 하위계층으로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난쏘공은 '우리를 믿고 따라오면 이렇게 해주겠다.'라고 유혹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밝은 미래, 희망도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그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진정으로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고, 난쏘공은 그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난쏘공의 작가인 조세희는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피마르게 아파서 소리 지르는 때가 있는데, 그 진실한 절규를 모은 게 역사요, 그 자신이 너무 아파서 지른 간절하고 피맺힌 절규가 난쏘공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아마 그래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난쏘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 테다. 난쏘공은 오늘날 문제의 핵심을 인간의 마음을 통해 그려내고 있으니 말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8점
조세희 지음/이성과힘

조세희의 <난장이...>는 대단히 비극적인 우리 시대의 소외딘 신화이자, 동시에 소외 초극의지의 신화이다. 현실주의적 전망이 닫혀 있던 시대, 아니 절망은 차치하고라도 현실 인식마저 미망에 휘둘려야했던 시절, 조세희는 이처럼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신화를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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